(출처-조선일보 2015.06.25 김태익 논설위원)
몇 년 전 제주도에 갔을 때 서귀포 이왈종 화백을 만나 "꼭 가봐야 할 데 하나만 추천해달라"고 했다.
이 화백은 대뜸 "김영갑 사진 갤러리" 했다. 못 들어 본 작가여서 고개를 갸웃했더니 웃기만 했다.
성산 일출봉 근처 산자락에 있는 갤러리는 단층짜리 폐교를 개조해 아담하고 소박했다.
입구에 '외진 곳까지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쓴 팻말이 서 있었다.
그러나 안은 복도며 방들이 관람객으로 가득했다.
모두들 진지하게 김영갑의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그의 어록을 메모했다.
알 만한 사람은 이미 김영갑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거다.
▶김영갑은 2005년 마흔여덟에 죽었다. 그는 제주도 사람이 아니다.
스물여덟에 제주에 들어와 홀몸으로 살며 한라산과 바다, 오름, 억새, 구름, 바람을 꼭 20년 찍었다.
그는 사진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공고를 나온 뒤 월남전 갔다 온 형한테 카메라를 선물 받고 사진에 빠졌다.
김영갑 갤러리를 찾는 사람이 한 해 10만명이다.
서울의 사진 갤러리로 치면 100만명쯤 되는 숫자라고 한다.
▶한라산 중산간 오름과 초원의 아름다움은 김영갑의 렌즈를 통해 세상에 퍼졌다.
'그곳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는 오름에서 때묻지 않은 자연을 발견했다.
그곳에 기대 씨 뿌리고 마소를 먹이며 살다 그 기슭에 영원히 몸을 뉘는 제주도 사람들의 삶을 보았다.
▶김영갑은 "제주의 바람을 알아야 제주를 안다"고 했다.
태풍이 불면 바위에 몸을 칭칭 감고 벼랑 끝에 서서 태풍을 찍었다.
오름과 초원에서 바람과 억새가 만나는 절정의 순간을 잡기 위해 보름이고 한 달이고 움막을 치고 기다렸다.
먹을 게 떨어지면 지천으로 널린 더덕·도라지·두릅·머위·산딸기로 배를 채웠다.
조랑말 먹으라고 밭 주인이 던져준 당근도 씹어먹었다.
▶김영갑의 사진들이 서울 나들이를 한다.
모레(06/27)부터 석 달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 전시회다.
그는 마흔둘부터 루게릭병을 앓았다. 근육이 장작처럼 굳고 오그라들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남긴 글에서 '나는 20년 동안 오름 하나도 모르면서 두 개, 세 개에 욕심을 부렸다.
모든 오름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표현하겠다고 조급함에 허둥댔다'고 했다.
그의 사진이 빛나는 것은 치열함에 겸허함을 더한 이런 정신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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