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2015-7-31
올 중반, 서울시립남부미술관에서 열린 '김종학 컬렉션'은 이색 전시회였다. 설악의 산야와 초화(草花)를 집중으로 그려온 화풍 덕분에 '설악산 화가'라 불리며 인기를 누려온 김종학(金宗學·1937∼)의 그림 내력, 곧 전시 부제(副題)대로 '창작의 열쇠'를 보여주고 있음이 이색적이었다. 그림 제작의 영감을 얻었던 조선 목기, 보자기, 자수, 옛 농기구 등의 수집품도 함께 전시했기 때문이다.
전시된 작가 그림엔 화조(花鳥) 민화를 따라 그린 모란 병풍도 있었다. 그의 그림 수업 내력을 직접 들어왔던 나에게 병풍 그림은 한마디로 격세지감의 존재였다. 미대를 다니던 1950년대 후반, 배운 바도 본 바도 없었다던 우리 민화에 뒤늦게 푹 빠졌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 그림 = 김종학, ‘단원을 따라서’, 1998
견주어 일제강점기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등 민예론자들은 민화의 가치도 앞서 알아봤다. 연장으로 1965년 한·일 관계가 정상화되자 일본 애호가들이 한국으로 건너와서 다투어 우리 민화를 수집해 갔다. 그 열기를 우리 골동상은 '소, 닭 보듯' 했다. 자유분방한 색채의 민화 수집을 패전으로 황급히 돌아갔던 조선 거류 일인들이 남겨 두고 갔던 그들의 우키요에(浮世繪)를 수복해 가는 행각으로 잘못 알았다.
이뿐 아니었다. 이 땅의 흙으로 빚은 청자·분청·백자는 오히려 일제강점기 때 그들의 안목을 통해 그 아름다움이 증폭됐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 문방구류 소품 백자만을 모았고,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일괄 기증한 의사 박병래의 도자 탐닉도 대학병원 조수 시절이던 1929년에 일본인 선배가 "조선인이 조선 접시를 몰라서야 말이 되느냐!"는 말을 듣고 분발했다 한다. 조선 목기 반닫이의 현대미감도 해방 직후 이 땅에 진주한 미군 문·무관들이 먼저 알아봤다.
따져보면 이방인의 눈이 아름다움을 먼저 가려낸 전례는 문화교류사에서 다반사였다. 목판으로 찍어 전단지, 포장지 등으로 많이 사용했던 일본의 우키요에도 모네, 고흐, 고갱 등 서구 인상파 대가들이 먼저 매료되어 사랑한 것이 세계적 미술로 부상한 결정적 계기였다.
해서 외국인 안목으로 우리 것에 대한 평가가 이뤄진 것도 그럴 법했다. 다만, 우린 20세기 전반에 나라를 잃고는 외세에 기대어 겨우 광복을 얻었다가 또다시 동족상잔의 전화에 시달렸던 파국의 연속에서 전통 문화자산에 대한 자각과 인식이 크게 지체되었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문화적 근대화의 차질이었다는 말이다.
근대화는 서구 전래의 사회 발전 방식을 말한다. 다행히도 우리 현대사가 근대화의 골간인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거둔 비약적인 성취는 세계사적으로 자타 공인이었다. 그런데 근대화의 전개가 결코 거기서 그칠 일이 아니었다. 문화의 의식화, 문화 인식의 대중화도 서구 근대화 역사의 경험이 일찍이 말해주었던 바다.
문화의 의식화로 말하면, 특히 1970년을 고비로 민예 부문에서 괄목했다. 일제강점기 때 애국운동의 일환으로 문화재를 모았던 간송 전형필 등은 "근본적으로 일본 선배들의 취향과 심미안과 가치 기준을 이어받은" 안목들이었다.
견주어 우리 경제가 고도성장의 탄력을 받자 덕분에 문화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져나갈 즈음, 특히 새마을운동의 농가개량 사업으로 옛 생활용품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거기서 오히려 우리 전통미학을 살피던 안목가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인습에 얽매여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도 "마음에 들면 서슴지 않고" 수집했던 것. 이를테면 귀신 탄다는 무당 그림, 투박해도 애교가 있던 석제(石製) 공예, 어른 장난감이던 표주박 등도 수집 대상이었다. 이 수집 대열엔 미국대사관저 한옥 설계의 조자용, 언론인 예용해와 김철순, 출판인 한창기, 화가 권옥연과 김종학 그리고 이들 수집 행각을 나라가 할 일을 대신 해주었다고 맞장구쳐주던 최순우 중앙박물관 관장 등이 돋보였다. 이들의 예리한 안목 덕분에 서울 인사동 골동 가게로 흘러들던 '고물'이 바야흐로 서화나 자기와 동렬의 '골동'으로 격상됐고, 보편적 미감이 확인되면서 '고미술'로 한껏 높아졌다.
조선 목기의 아름다움은 이제 보통사람에게도 널리 사랑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정통 수장가들이 열심히 수집했던 화원 이름이 적힌 고서화는 오히려 중국화의 아류라고 치부하면서, 대신 민화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고 그래서 '한화(韓畵)'란 작명이 마땅하다고 공감하게 되었다. 전통시대 부녀들이 자투리 베도 아끼던 규방의 근검절약이 낳았던 보자기 또한 몬드리안에 못지않은 현대 감각이었다. 이 점에서 요즘은 만보객,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인사동 골목 어느 어귀에 조형문화의 근대적 의식화가 발현했던 곳임을 알리는 표석이라도 세울 만하지 않을까.
광복 70년 역사는 그 초기는 건국과 전후 복구의 국민통합에 매달렸다. 이어 산업화의 성공 덕분에 민주화의 진척은 물론 '의식이 족해야 영욕(榮辱)을 안다'는 말대로 문화의 의식화·생활화도 크게 고양되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문화가 밥 먹여 주나'가 우리 수준이었다. 이전에 말만 해도 '벌 받을 짓'이라던 문화는 이제 공직자들도 그 중요성을 선창(先唱)할 지경이 되었다. 문화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말도 많아졌다.
하지만 사랑의 몸짓이 아직 함량 미달임은, 엉터리에게 4대 국새(國璽)제작을 맡겼던 졸속 문화 행정이 말해준다. 앎보다 좋아함이 훨씬 윗길이라 했으니 문화는 판화 한 점이라도 돈으로 직접 사 본, 머리로 굴림이 아니라 마음으로 좋아하는 이가 감당해야 할 바 아니겠는가.
김형국 /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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