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他/백선엽·김종필

"좌익 경력 혁명 지도자와 협상해봐라" 김일성은 박정희를 오판했다

바람아님 2015. 8. 10. 01:01
[중앙일보] 2015.04.22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2> 밀사냐 간첩이냐 '황태성 사건' ②
친구 동생 박정희 믿고 서울 잠입
황태성은 ‘밀사’로 자처했지만
김일성 의도는 남한의 북한 합류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죽어라’뜻

일제시대 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된 황태성의 사진. 경기도 경찰부가 작성한 ‘감시 대상 인물카드’에 나와 있다. 왼쪽은 1928년(22세), 오른쪽은 1934년(28세)의 모습이다. 경북 김천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했던 황태성은 학생전위동맹 사건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 카드엔 그의 키가 5척3촌1분(약 161㎝)으로 적혀 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1961년 10월 20일 중앙정보부는 서울에 잠입한 전 북한 무역상 부상(副相·차관급) 황태성(黃泰成)을 연행했다. 황태성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친형과 친구다. 그는 박정희 의장과 김종필(JP) 중앙정보부장, 두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며칠 뒤 JP는 박 의장을 찾아가 ‘거물 간첩(間諜) 황태성 검거’ 내용을 처음 보고한다.

 황태성이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이북에서 내려왔다는 보고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얼굴은 내내 굳어 있었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던 박 의장이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야.”

 나는 힘주어 대답했다. “조사할 거 조사하고 나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두고두고 화근거리가 됩니다.” “아…, 어떻게.” “법적 절차는 다 밟습니다. 재판을 해야 하니까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제가 알아서 조치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 말을 듣고서야 박 의장 얼굴에 화색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말이 없었다. 혼자 마음속에서 주고받고 하면서 고민을 하는 듯했다. 어려서부터 ‘형님, 형님’하며 황태성을 따라다녔는데, 그 흉중(胸中)에 물결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 의장은 다른 말 없이 “그래, 잘 좀 취조해 봐”라고 말했다. 황태성 처리에 대해 박정희 의장이 내게 내린 지시는 그게 전부였다.

 황태성 사건을 되돌아보는 김에 내 장인이자 박정희 의장의 셋째 형인 박상희(朴相熙·1906~46)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장인은 일제(日帝) 시절 동아일보의 경북 구미지국장을 지냈다.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대해 울분을 느끼던 분이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독립운동을 하다가 여러 번 경찰서와 감옥을 오갔다. 당시 해방 전후는 사상을 따지기 힘든 혼돈의 시기였다. 민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진보주의가 얽혀져 구별이 안 됐다. 그 시절엔 대부분 한 묶음으로 좌익이라고 치부했다. 내가 알기로 장인 박상희는 진보주의, 민족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장인은 큰딸인 내 아내 박영옥을 귀여워하셨다. 아내는 학창 시절 구미에서 대구 신명여고로 기차 통학을 했다. 하교 때면 장인은 구미역 뒤편 언덕 위 집 앞에 나와 담배를 물고 서서 플랫폼을 내려다보셨다고 한다. 딸이 열차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동안 어떤 남학생이 수작을 걸고 따라오지는 않는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신 것이다.

 장인은 46년 10월 1일 대구사건이 경북으로 확산되면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일부에 장인이 구미의 주동자로 알려진 것은 틀린 얘기다. 구미의 유지였던 장인은 불필요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좌우 양측 중재자(仲裁者)로 나섰다. 46년 10월 6일 구미경찰서 서장실에서 장인은 좌익 간부와 경찰서장을 앉혀놓고 사태 수습을 논의하던 중이었다. 그때 수도경찰청 소속의 경찰대가 들이닥쳐 ‘대구폭동’ 주모자를 색출한다며 덮어놓고 총을 마구 쏘아댔고, 그 총탄에 장인이 맞아 돌아가셨다. 장인은 중재하러 나섰다가 죽임을 당하셨으니 공산당과는 거리가 있다.

 내 장모 조귀분(趙貴粉·1908~93) 여사는 신식 교육을 받은 ‘모던 걸’이었다. 젊었을 땐 발목이 드러나는 검은색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삐딱구두(하이힐)를 신고 다녔다. 김천·구미·대구에서 여성운동을 했다. 역시 그 지역에서 특출한 인물이었던 장인과 자연스럽게 만났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장모는 시동생인 박정희 의장을 아끼고 뒷바라지해줬다. 대구사범을 나와 문경에서 보통학교 선생을 하던 박 의장이 만주로 갈 때(군관학교 입학) 장인 박상희의 금시계를 훔쳐서 준 게 장모였다.

1961년 9월 최고회의 행사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는 박정희 의장(앞줄 왼쪽). 그의 왼쪽 뒤편에 박종규 경호대장, 오른쪽 뒤편에 선글라스 낀 김종필 중정부장이 서 있다. 맨 오른쪽은 최덕신 주월남대사. [중앙포토]

코를 골며 낮잠을 자고 있던 장인의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몰래 빼서 내줬다 한다. 잠에서 깬 장인이 “시계 어떻게 했느냐”고 묻자 장모는 “시동생이 만주 가는데 여비 줄 돈이 없어서 생각다 못해 당신 시계를 꺼내 줬다”고 털어놨다. 장인은 처음엔 “아니, 이 녀석이”라며 화를 냈다. 장인은 박 의장이 일제가 창설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화를 참았다고 한다. 장모 말로는 장인은 결국 ‘아, 동생이 그게 없으면 만주로 가지 못할 형편이구나. 잘 가거라’라는 태도를 보였다.

 황태성은 내 장인과 어릴 때부터 친했다. 경북 김천에서 활동을 했던 황태성은 대구 10·1 사건의 주동자였다. 그 후 대구사건 관련자에 대한 검거 열풍이 거세지자 황태성은 북쪽으로 도피했다. 과거 일제 땐 독립운동을 했고 민족주의자였겠지만 월북 후 공산당 정권의 부상을 지냈다.

 황태성은 신문 과정에서 간첩이 아니라 김일성 밀사(密使)로 행세했다. 황태성은 박정희를 만나 남북 합작을 협상하라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내려온 것이 분명했다. 남북 간 현안 문제를 해결하고 사이좋게 하자고 박 의장과 나를 설득하라는 밀명(密命)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사이좋게’라는 건 남한이 손들고 북한에 합류하도록 적화(赤化) 공작을 하라는 뜻이다. 황태성의 친구인 박상희의 동생이 혁명에 성공해서 남한을 쥐고 있고, 그 사위는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정보가 김일성에게 들어갔을 거다. 김일성은 박 의장의 과거 좌익 전력(前歷)도 주목했을 것이다. 그러니 황태성을 보내서 그 둘을 잡고 얘기를 하면 뭔가 하나 얻어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기대한 듯하다. 되든 안 되든, 내려가서 한번 공작(工作)을 좀 해보라고 보냈을 것이다.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거기 가서 죽어라’는 뜻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자신의 사상에 대한 의심 때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5·16 혁명 뒤에도 군내 일부 세력은 “박정희는 빨갱이다”고 떠들며 음해했다. 미국도 박 의장의 사상을 의심스러워했다. 오죽하면 내가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 1의(義)로 삼는다’는 혁명 공약을 첫머리로 내걸었겠나. 이런 일로 박 의장의 정체가 의심받을 빌미를 줬다간 자칫 혁명 과업까지 망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자신의 좌익 콤플렉스에 대해 내게 고충을 토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 심중을 헤아리고 있어서다.

 김일성은 혁명 지도자인 박정희 의장을 오판했다. 김일성은 나에 대해서도 몰랐다. 나는 북녘 땅에서 휴전선을 넘어 내려온 황태성을 큰 간첩으로 취급했다. 그 이상으로 치지 않았다. 나는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면서 이렇게 결심했다. ‘나라의 근대화 과업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어떤 누구라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동안은 용서하지 않는다. 내가 모든 책임, 전 생명을 걸고 박정희 의장을 뒤에서 도우면서 근대화 과업을 밑받침하겠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게 나의 일관된 철학이었다. 혁명의 대표가 박 의장이고, 혁명의 뒷받침이 곧 박 의장 뒷받침이다.

 황태성은 혁명 과업 수행에 결정적 장애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되도록 빨리 정리하기로 했다. 박정희 의장을 위해서도 그 길밖에 없었다. 박 의장이 밖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황태성이란 문제점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은 나와 같았다고 본다.

 그를 밀사라고 볼 수 없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밀사였다면 황태성이 내려오기 전에 우리 쪽에서 어느 정도 물밑 호응이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황태성의 서울 잠입을 정보부장인 나는 몰랐고, 내가 보고드리기 전까지 박 의장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박 의장과 나는 황태성을 만날 까닭이 없고, 만나지 않았다.

 그해 7월 남쪽에서 영관급 군인이 남북회담을 먼저 제의해서 이를 확인하러 황태성이 내려왔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 제의는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것이 아니며 중앙정보부와 사전 협의도 없었다. 육군첩보부대(HID)의 요원 몇 명이 대북 공작을 하면서 한 건 올리기 위해 북한에 가서 그런 소리를 한 것일 뿐이다. 이철희(李哲熙) HID대장(준장)도 처음엔 그 내용을 잘 몰랐을 거다. 그때 HID는 동쪽에선 함경북도까지 올라가 공작 활동을 했다. 인민군 주력부대가 있던 서쪽에선 별 성과를 내지 못해서 그런 일을 꾸몄다. 나는 그 일을 나중에야 보고받았다. 세상에 떠도는 말 중엔 허튼소리가 적지 않다. HID 공작은 중앙정보부는 물론 혁명정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정리=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 소사전 HID 남북회담 제의 = 육군첩보부대(HID) 서해지구 파견대가 정보수집을 위해 자체적으로 벌인 대북 공작. 1961년 7월 HID는 북측에 사람을 보내 남북 영관급 회담을 제의했다. 황태성은 자신의 남하(南下)를 “남한에서 간 밀사에 대한 환례(還禮)”(재판기록)라고 주장했다. ‘환례’는 HID 공작에 대한 응답을 뜻한다. 그해 9월 말부터 서해의 북한 용매도 등지에서 비밀회담을 벌였다. HID 공작과 회담은 중앙정보부와 관계가 없다. (JP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