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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학살 북 리뷰…구월,도쿄의 거리에서

바람아님 2015. 8. 29. 12:13

(출처-중앙일보 2015.08.28 채인택 기자)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
가토 나오키 지음, 번역모임 서울리타리티 옮김, 갈무리, 292쪽, 1만9000원


평범한 얼굴의 일본인이 아무렇지 않게 조선인 수천 명(6000명 이상으로 추정)을 집단 

학살했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23년 9월1일 발생한 도쿄와 인근 지역을 

덮친 간토대지진 직후 벌어졌던 광란의 '간토대학살' 이야기다. 

일본 프리랜서 작가로 근대사에 관심이 많은 지은이는 수많은 직·간접 증인과 발굴문서를 

들이대면서 사건의 비인간성을 고발한다.

책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간략히 알아보자.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대지진이 발생해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일본 내무성이 경찰에 내려 보낸 문서에 '조선인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 포함된 게 발단이었다. 

일본인은 죽창과 칼, 몽둥이를 들고 조선인을 보는 족족 무차별 학살했다. 행정당국과 군대까지 가담했다. 

고관자제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는 유학생보다 힘없는 노동자들이 주로 당했다.

학살은 우에노 공원이나 이케부쿠로 등 도쿄 중심부에서 주변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인구 1300만 명의 초현대도시가 90여 년 전에는 90년대 르완다나 유고슬라비아처럼 ‘인종 청소’의 잔혹한 살육극의 

현장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지금도 이 도시에선 백주대낮에 ‘조선인을 몰살하라’고 외치는 혐한(嫌韓) 시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지은이는 도쿄를 “민족차별 또는 인종주의에서 비롯한 유언비어에 선동돼 평범한 사람이 학살에 손을 담근 

과거를 갖고 있는 도시”라고 지적한다. 

간토대학살의 진상을 '아는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사이타마현 요리이미치에서 엿을 팔다 그 해 9월6일 심야에 자경단에 살해된 구학영이라는 젊은이에 주목한다. 

미야자와 기쿠지로라는 사람이 구학영의 시신을 수습해 묘를 썼고 비에는 ‘미야자와 기쿠지로와 뜻있는 사람들’이라고 적혀 

있다. 지은이는 미야자와의 신원을 추적해 그가 동네 안마사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가난했을 두 사람이 생전에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교류하는 관계였기에 묘라도 쓸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지은이는 조선인 학살을 연구하는 야마기시 시게루를 인용해 실제로 조선인과 말 한마디 나눠본 적이 없는 패거리와 달리 

조선인 누군가와 관계를 가지고 있던 사람 중에 이런 지킴이가 나왔음에 주목한다. 

교류와 소통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이런 인간적인 관계의 반대편에 있는 '비인간화'가 민족차별의 증오범죄의 수단이 된다고 강조한다. 

지진 발생 4년 전에 벌어졌던 3·1운동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의 폭동으로 여기던 일제가 의도적으로 비인간화를 조장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외국의 강권 지배에 분노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인데 이를 부정하기 위해선 그들을 호소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는 비인간으로 그릴 필요가 있었다"고 파악한다. 

그래서 조선인을 ‘거짓말쟁이’ ‘범죄자’ 외국의 앞잡이‘ 등 온갖 부정적인 딱지를 붙였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지금 일본의 주간지와 인터넷에서는 한국인·조선인을 다시 비인간화하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지적한다. 난징대학살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에 마이너스로 여겨지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그 피해자나 피해국을 비인간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지진 후 조선인 학살사건이 널리 알려진 뒤에도 일본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죄도 없었던 것은 

문제로 지적된다. 소수의 자경단원이 아주 가벼운 형량을 선고 받은 것으로 학살사건은 유야무야됐다. 

일부에선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100여 명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사이타마현 혼조시에서는 지진 다음해에 

위령비를 세웠다. 하지만 지은이는 ‘선인의 비(鮮人之碑)’라고만 적었을 뿐 자신들의 죽인 당사자라는 무거운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당국은 사실 규명을 원치 않았으며, 학살 사실을 망각하도록 만들고 싶어 했다고 강조한다.

진실을 알고 행동에 나선 일본인도 적지 않다. 

도쿄 아다치구의 소학교 교사였던 기누타 유키에(1930~2008)가 그 중 한 명이다. 

77년 마을역사를 취재하던 중 동네 노인으로부터 당시의 학살극을 전해 듣고 충격에 빠졌다. 

그래서 82년 ‘간토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하고 위령(나중에 추도로 바뀜)하는 모임’을 발족해 활동한다. 

이 단체는 기누타가 세상을 떠난 뒤인 2009년 8월 누가 살해했는가를 분명히 명시한 추도비를 학살 현장인 요쓰키바시 다리 

앞에 세웠다. 

묘비는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수많은 한국, 조선인들이 일본의 군대, 경찰, 유연비어를 믿은 민중의 손에 살해됐다'는 

사실을 분명히 담았다. '이 역사의 마음을 안고서 희생자를 추도하고 인권회복과 민족의 화해를 기원하며 이 비를 건립한다'는 

마지막 구절이 울림을 준다. 추모비 주변에는 조선의 고향을 상징하는 봉선화를 심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라는 노랫말이 

떠오르면서 당시 사건을 아는 것을 넘어 느끼게 해준다.

지은이는 당시 어린이들이 쓴 글을 통해 아이들이 학살을 목격한 것은 물론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는 사실도 밝혀낸다. 

학살을 목격하고 평생 트라우마를 안은 채 살아간 경우도 소개한다. 

증오범죄는 학살은 물론 산 사람의 영혼도 파괴한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의미심장한 말이 인용된다. 

재일 한국인 여성이 했다는 “우리 할머니는 말씀하셨죠. ‘일본인은 돌변한단다. 그래서 무섭다’라고”라는 말이다. 

이 말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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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책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지음, 

김동수·박수철 옮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은 최강의 권력으로 

변한 계엄권력 아래에서 

관민(官民) 일체로 행해진 

것이었다. 

관동대학살이 또 하나의 식민지 

전쟁이었음을 밝히는 

연구서. 역사비평사, 

1만8000원.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

저 : 야마도 쇼지 

역 : 이진희 

출판사 : 논형 

발행일 : 2008년 07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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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동아일보 2015-08-29 )



======================<< 조선·동아, 일제탄압에도 대학살 보도 >>==========================

[관동대학살 90년] "朝鮮人의 暴行은 絶無(전혀 없다)"… 조선·동아, 일제탄압에도 대학살 보도

(출처-조선일보 2013.08.30 허윤희 기자)

총독부 압수·발행금지하자 호외 발행해 검열 피하기도

"그곳 신문 호외에는 품천(品川·시나가와)에서 조선 동포 삼백명을 ○○('살해'로 추정·총독부가 삭제)하였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대개 우리 동포의 소식은 엇지 되얏는지 모른다."

조선일보 1923년 9월 8일자에 실린 '中途(중도)에 歸還(귀환)한 留學生(유학생)'이란 표제의 기사다. 
일제의 정보 차단 속에서도 관동대지진 이후에 벌어진 학살 사건을 어떻게든 독자에게 알리려고 했던 이 기사는, 
총독부 경무국이 압수 조치했다.

첫 관련 기사가 실린 9월 3일자부터 조선일보는 지진과 학살의 참상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와 함께 요코하마(橫濱)에서 자행된 학살 사건을 다룬 '횡빈에도 ○○사건 발생'과, 국내의 항일 폭동을 두려워하는 
일본 정부의 비밀 지령을 폭로한 '조선총독에게로 警戒(경계)' 기사를 썼다. 
엄격한 통제가 내려졌지만 9월 5일자에서도 '3개처에 불온 사건' 기사를 통해 학살 속보를 내보냈다. 
총독부는 기사 압수와 발매 금지 처분을 했으나, 그때마다 호외를 돌리는 방식으로 검열을 피했다.

9월 24일자 '朝鮮人(조선인)의 暴行(폭행)은 絶無(절무)'에선 일본 경시청의 비밀 보고서를 입수해 
"조선인의 폭행이나 방화 사건은 없었다"는 사실을 전하며 동포들이 원통하게 죽어갔음을 강조했다. 
10월 4일자 '臨時政府(임시정부)에서 抗議(항의) 提出(제출)' 기사는 상해 임시정부가 일본 총리에게 조선인 학살에 
대한 항의문을 보냈다는 내용이었고
같은 날 실린 논설 '僑日同胞(교일동포)에게'는 재일동포에게 '차라리 귀국하는 것이 낫다'고 권함으로써 일본의 만행을 
규탄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23년 9월 1일부터 11월 1일까지 게재 금지 조치를 한 조선일보·동아일보의 관동대학살 관련 
기사는 모두 602건이었으며, 차압(압류) 조치는 18회였다. 
일제의 언론 탄압에 맞서 사건의 진상을 전하려는 끈질긴 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