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2015.09.02 선우정 국제부장)
120년 전 일본은 외교 노선을 바꾼 조선의 왕비를 살해했다
그 야만적 속성이 언론의 배설구를 통해 다시 더럽게 쏟아졌다
경복궁의 남단 광화문에서 북단 건청궁까지 뛰어서 7분 정도 걸렸다.
120년 전 조선에 있던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치가 왕비 시해 현장을 그린 경복궁 지도의 순로(順路)를
따라갔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광화문을 돌파한 일본군 수비대 주력은 왕비가 머물던 건청궁을 향해
더 빠른 속도로 달렸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의 두 차례 저항은 쉽게 무너졌다. 일부는 총소리에 놀라 도망갔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의 두 차례 저항은 쉽게 무너졌다. 일부는 총소리에 놀라 도망갔다.
경복궁 난입에서 시해까지 몇시간 걸리지 않았다.
러시아를 끌어들인 왕비의 외교정책으로 시국은 살벌했다.
일본이 왕비를 살해할 것이란 소문이 장안을 떠돌았다. 그런데도 경비는 허술했다.
왕비는 서양인 몇 명을 곁에 두면 일본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서양인은 참상을 지켜봤을 뿐이다.
건청궁 지도에 영사 우치다는 붉은 글씨로 1, 2, 3 숫자를 썼다. 인근 언덕의 남쪽엔 4를 적었다. 그가 남긴 보고서에 따르면
건청궁 지도에 영사 우치다는 붉은 글씨로 1, 2, 3 숫자를 썼다. 인근 언덕의 남쪽엔 4를 적었다. 그가 남긴 보고서에 따르면
1은 왕비를 습격한 건물인 장안당,
2는 1지점에서 왕비를 끌고 가 살해한 장안당 뒷마당,
3은 왕비의 시신을 옮긴 옥호루,
4는 왕비의 시신을 불태운 녹산(鹿山)이다.
당시 건청궁에는 고종과 훗날 순종이 된 왕세자, 왕세자비도 있었다.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에 의해 고종은 옷이 찢겼고, 왕세자는 상투가 잡혔고, 왕세자비는 왕비를 찾아내라는 일본군의
칼끝 위협을 받았다. 왕비 앞에서 일본군을 막은 충신 이경직은 두 팔이 잘려 죽었다.
왕비는 궁녀들과 함께 흉도(凶刀)에 쓰러졌다.
건청궁은 소박했다. 넓은 경복궁에서 왜 구태여 이런 곳에 살았을까 의아할 정도다.
건청궁은 소박했다. 넓은 경복궁에서 왜 구태여 이런 곳에 살았을까 의아할 정도다.
사건 장소인 장안당과 옥호루는 복도로 이어져 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모든 일이 일어났다.
왕과 왕세자는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을까. 비명을 듣지 못했을까.
건청궁에 가보면 일부러 눈을 감고 귀를 막지 않는 이상 보거나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까. 결국 일본 왕실의 일원으로 전락한 치욕 때문이었을까.
고종과 순종은 그날 보고 들은 일을 말하지 않았다.
당시 명성황후의 외교정책은 청일전쟁 승리로 구축한 일본의 한반도 패권을 일거에 흔들어 놓은 모험이었다.
당시 명성황후의 외교정책은 청일전쟁 승리로 구축한 일본의 한반도 패권을 일거에 흔들어 놓은 모험이었다.
한성신문사 사장으로 시해에 가담한 아다치 겐조의 훗날 기록이 당시 일본의 속내를 드러낸다.
'조선 놈들이 머리를 불쑥 쳐들고 와서 일본을 경멸했다.'
아다치와 함께 시해에 가담한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는 '일본 제국이 완전히 반도에서 배척당하는 일대 위기였다'고
기록했다.
평가는 엇갈린다.
평가는 엇갈린다.
외교 노선 전환과 함께 당시 조선에 반드시 필요했던 개혁까지 일본의 요구였다는 이유로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를 읽으면 청일전쟁 승리와 함께 야수처럼 조선을 농단한 일본의 폭주를 그 외 무슨 방법으로 견제할 수
있었을까 고민하게 된다.
왕비의 노선 전환과 시해 사건은 아관파천으로 연결되면서 조선에서 일본의 기세는 꺾였다.
그 후 일본이 패권을 되찾는 데엔 러일전쟁까지 10년이 걸렸다.
왕비의 인생에 대한 평가는 인색해도 당시 왕비의 정책 자체는 국권 방어를 위한 고육책으로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왕비가 죽음으로 남긴 긴 시간을 살아남은 자들이 부국강병과 국권 수호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일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일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한다.
천안문 망루에 중국 주석과 함께 선 박 대통령의 모습은 '통일 외교'를 상징하는 역사적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120년 전 국권 수호를 향한 열망만큼 지금 통일을 원하는 국민은 박수를 칠 것이다.
하지만 일본 우익은 분노할 것이다. 조선 왕비를 향했던 것과 비슷한 분노가 대상과 방법을 바꿔 분출할 것이다.
12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그 속성은 이미 언론 간판을 단 인터넷의 배설구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선 놈들이 머리를 불쑥 쳐들고 와서 일본을 경멸했다'는 아다치의 분노가 그대로 지금 그들의 속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이 남긴 일명 '스나가 노트'는 명성황후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한다.
일본인이 남긴 일명 '스나가 노트'는 명성황후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한다.
"왕비는 위를 향한 채 쓰러졌고 '후우, 후우' 하며 숨을 쉬고 있었다.
장사(시해범)들은 사진과 왕비의 얼굴을 대조해보고 있었다. 왕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왕비는 얼마간 살아 있었다. 희미한 숨을 이어가다가 녹산의 화염 속에서 절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자신의 나라가 행한 일임에도 영사 우치다는 "역사상 고금을 통틀어 전례 없는 흉악"이라고 했다.
천안문 망루의 박근혜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내며, 대담한 통일 외교의 성공을 기원한다.
천안문 망루의 박근혜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내며, 대담한 통일 외교의 성공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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