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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35] 가정집 문패에 가족數도 표기.. 안 달았다가 철창신세 지기도

바람아님 2015. 9. 4. 10:57

 조선일보 2015-9-2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매출이 갑자기 몇 배로 뛴 업종이 있었다. 문패 제작업자들이다. 군사정부가 그해 "6월 30일까지 전국 가가호호 모두 문패를 내걸도록 종용하라"고 자치단체에 지시하자 손님들이 장사진을 쳤다. 사회 곳곳에 거침없이 메스를 대던 군사정부는 가정집 문패에 주소, 이름은 물론 가족 수까지 명기하라고 했다(조선일보 1961년 6월 23일자). 이승만 정권 시절엔 문패 안 단 가구주를 잡아 가두기도 했다. '문패 미게시'는 '노상방뇨' '야간 통행금지 위반' 등과 함께 45가지 경범죄의 하나로 단속했다. 195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하필 야당 입후보자나 당원들 집을 집중 조사해 문패가 없으면 10~20일씩 구류를 살게 했다. 야당 탄압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조선일보 1956년 7월 14일자).

 

무리수까지 두어 가며 문패 달기를 밀어붙인 정부가 내세운 가장 큰 이유는 우편물 배달이었다. 1968년 서울의 57만 가구 중 문패 없는 집이 24만 가구(42%)나 됐다. 시내의 월 우편물 1320만 통 중 14만 통은 끝내 번지수를 못 찾고 반송됐다. 1982년에도 전국 750만 가구 중 170만 가구(23%)가 문패를 안 달았다. 한 해 12억 통이나 되는 우편물 중 1300여만 통이 반송되고 있었다. 정부는 수십년간 연례행사처럼 문패 달기 운동을 벌였지만, 그야말로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집들이 수두룩했다. 판잣집 주민, 세입자처럼 달고 싶어도 못 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문제는 일부러 안 다는 사람들이었다. 체신부 우정국장은 문패 안 다는 3가지 부류 중 첫 번째로 '자기 노출을 꺼리는 저명인사나 부유층'을 꼽았다. 1970년 시가 3000만원(오늘의 약 17억원) 이상 호화주택 소유자가 330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탈법하며 축재한 사람들이 사는 '도둑촌'도 사회 문제가 된다. 1970년 초 박정희 대통령이 "고위 공직자·정치인 중 호화주택 보유자는 3개월 안에 처분하라"고 강력 지시하자 '도둑촌'의 문패들이 상당수 사라졌다. 야당이 국회에서 이를 문제 삼자, 답변에 나선 정부 관계자는 "문패 달기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동문서답해 국민을 우롱하느냐는 비판을 받았다.

 

요즘도 단독 주택에는 문패를 걸기도 하지만 거의 사라진 셈이다. 호화주택이 아니더라도 사생활을 지키자니 문패 걸기는 망설여진다. 최근 어떤 아파트 주민이 "온 식구 이름 다 넣어 문패 예쁘게 걸었어요"라고 블로그에 자랑했더니 이런 댓글이 붙었다. "우편함 뒤져 누가 사는지 확인해 보이스 피싱 하는 세상인데, 좀 걱정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