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2015-09-11
수로왕이 건국해 532년까지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금관가야의 왕궁 터로 추정되는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제2호)이 본격적으로 발굴된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오는 14일 오전 11시 개토제(開土祭)를 시작으로 2018년까지 경남 김해 봉황동 316번지 일대를 발굴 조사한다고 10일 밝혔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1907년부터 간헐적으로 이뤄진 조사를 통해 회현리 패총과 토성, 주거지, 마을 경계 부분에 만들어진 도랑인 환호(環濠) 등이 확인됐다. 부산대학교 박물관은 1999∼2000년 발굴 조사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주거지 유구(遺構)를 발견하기도 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곳이 금관가야의 도성이었다는 내용이 없지만, 1899년 발행된 ‘김해읍지’ 고적(古蹟)조에는 ‘수로왕궁지는 지금의 (김해)부 내에 있다고 전해지며, 고궁지는 서문 밖 호현리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 발굴 조사를 통해 김해 봉황동 유적의 복원·정비와 학술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고, 500년 역사에 빛나는 금관가야의 역사성과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승훈 기자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오는 14일 오전 11시 개토제(開土祭)를 시작으로 2018년까지 경남 김해 봉황동 316번지 일대를 발굴 조사한다고 10일 밝혔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1907년부터 간헐적으로 이뤄진 조사를 통해 회현리 패총과 토성, 주거지, 마을 경계 부분에 만들어진 도랑인 환호(環濠) 등이 확인됐다. 부산대학교 박물관은 1999∼2000년 발굴 조사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주거지 유구(遺構)를 발견하기도 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곳이 금관가야의 도성이었다는 내용이 없지만, 1899년 발행된 ‘김해읍지’ 고적(古蹟)조에는 ‘수로왕궁지는 지금의 (김해)부 내에 있다고 전해지며, 고궁지는 서문 밖 호현리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 발굴 조사를 통해 김해 봉황동 유적의 복원·정비와 학술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고, 500년 역사에 빛나는 금관가야의 역사성과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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