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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오선위기, 태극기, 한반도기

바람아님 2015. 9. 17. 10:44
세계일보 2015-9-16

한국을 둘러싼 지정학적 형국을 두고 흔히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두는 ‘오선위기(五仙圍碁)’라는 말이 구한말부터 유행했다. 다섯 신선이란 미국과 일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바둑판의 주인인 한국을 말한다. 네 신선이 훈수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바둑을 두다가 떠나면 바둑판만 남게 되는데 이것이 한국의 독립 혹은 통일이라는 비유이다.

오선위기는 단기적으로는 틀렸다. 청일전쟁·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자연스럽게 한반도에서 지배권을 갖게 되고, 미국도 태프트·가쓰라 비밀협약으로 미국의 필리핀 지배에 동의하는 것을 조건으로 승인함으로써 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하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


일제에 강제병탄되기 전에 고종은 외교적인 일로 국기를 정할 필요가 있었다. 태극기의 제정 과정은 여러 설이 있지만, 유력한 것은 고종의 결정이다. 우연하게도 고종은 태극기를 떠올리게 된다. 집단무의식은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이 집단상징을 결정한 셈이다. 태극기의 명칭은 처음엔 ‘조선국기’였다.

태극기는 오선위기보다 오늘의 한국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태극기는 비록 분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한국인의 역동성을 표현하기도 한다. 중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가 태극기라고 한다. 태극사상은 중국도 전통적으로 공유했지만 그 좋은 사상을 한국이 국기에 요약함으로써 한국의 브랜드가 되었기 때문이다. 태극기는 동양문화의 정수를 내포한 채 한국인의 상징이 되고 있다.


남북교류가 활발해지고 통일에 대한 염원이 다시 강하게 분출할 즈음 한반도기가 등장했다. 한반도기는 물론 ‘하나 된 한반도’를 상징한다. 올림픽을 비롯해 남북한이 단일팀을 구성해서 출전하거나 남북한의 공동 체육·예술행사가 있을 때 등장하는 깃발이다. 남북한은 한반도기를 통일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푸른색의 한반도기는 한국의 가을하늘처럼 평화롭고 젊고 씩씩하고 희망에 찬 미래를 상징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한반도기는 통일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집단상징이다. 현재 통일에의 가장 큰 장애는 한국인의 분열된 마음이다. 통일이 저절로 오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통일의지가 없거나 부족하면 비록 객관적인 국제정세가 통일에 유리하게 움직이더라도 기회를 잡을지는 미지수이다.


구한말과 오늘의 상황은 매우 닮아 있다. 남북분단으로 오선위기는 태극기처럼 육자회담의 형태가 되었지만 큰 그림은 역시 오선위기이다. 구한말과 한 가지 크게 달라진 점은 한국(남한)의 국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 들어갈 수준이라는 점이다. 개화와 쇄국의 틈바구니에서 구한말처럼 망국으로 치닫던 것이 아니라 역사의 풍파와 불확실성 속에서도 국력을 상승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태극기가 통일 후 분단이 아니라 한국의 역동성만을 상징할 날을 기대해본다.


한·중·일이 동아시아경제공동체를 달성해야 할 시기에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고사하고 거꾸로 군국주의로 치닫고 있다. 구한말과 다른 한국과 중국의 경제발전과 국력의 상황에서 일본이 거둘 이익은 무엇일까. 탈구입아(脫歐入亞)의 시기에 시대를 역행하는 일본의 행보는 안타깝다.

한국의 통일 없이는 결코 아시아경제공동체의 결성과 유라시아 대륙으로 철도연결을 통한 동아시아 경제의 재도약과 부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일본의 살 길도 실은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서 미개척지인 만주·시베리아와 북한의 경제개발을 통해 자금과 기술지원을 통해 국익을 얻는 데 있을 것이다.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아베정권의 일본은 지금 전쟁법안 반대투쟁에 나선 수많은 일본 국민과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명성황후를 떠올리는 우익 언론인, 그리고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 자객의 후손들이 한국에 와서 조상의 죄를 사죄하는 다기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본 집권층의 역사적 역리와 한국의 순리를 바라보면서 엇갈리게 될 두 나라의 운명을 바라본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