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플러스] 입력 2015.09.28
또 다른 세계에서 온 그림
“수술대 위에서 벌어진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은 아름답다”라는 시 구절을 들어 본적이 있는가? 몇 번을 읽어보아도 뜻하는 바를 알 수 없는 이 구절은 프랑스 시인 로트레아몽 (Isidore-Lucien Ducasse)의 <말도도르의 노래>의 한 부분이다. 초현실주의적 미개념을 압축해놓은 이 말도 안 되는 노랫말 같은 세계를 회화적 언어로는 ‘데페이스망(depaysement)’ 이라고 이라 부르는 데, 데페이즈망은 본래 ‘나라나 정든 고향을 떠나는 것, 또는 추방’을 의미하는 말로 회화에 있어 일상적인 물건을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어 전혀 다른 이상한 상황에 옮겨놓아 초월적인 또 다른 세계를 전개시키는 초현실주의 기법을 뜻한다.
조르조 데 키리코, <사랑의 찬가>, 1914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종잇장처럼 얇은 벽면에 그리스양식의 아폴로두상과 빨간 고무장갑이 함께 걸려있다. 그림의 오른편에는 지중해식 건물이 서있고 저 멀리 후경에는 기차 또는 공장처럼 보이는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림 전경에는 아폴로 두상과 빨간 고무장갑의 강렬함에 가려진 녹색의 구체가 어두운 바닥에 놓여져 있다. 이 사물들은 왜 한 공간에 모이게 되었으며 무엇을 뜻하는 걸까? 아무런 연관성 없이 그저 작가의 주관에 의하여 ‘우연한 만남’을 하게 된 그림 속 사물들. 전형적인 데페이즈망 기법의 그림이다. 조르조 데 키리코(1888.7.10-1978.11.20)는 이성을 초월한 잠재의식의 세계를 구현하는 형이상학회화의 작품 세계를 개척해, 후에 등장하는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가 된 화가이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선 인간
2014년 9월 밀라노에서 열린 명품 브랜드 펜디의 2015 S/S 컬렉션의 런웨이 모습이다. 펜디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무대는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 <불안하게 하는 뮤즈들>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물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Palazzo della Civilta Italiana)’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되었다고 한다. 키리코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치는 이탈리아 건축의 기둥이나 탑등과 함께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이다. 이것은 그리스 출생이라는 태생적인 이유와 화가가 되고부터는 파리와 뉴욕 이탈리아를 오가는 방랑의 삶을 살면서 가지게 된 고향 이탈리아에 대한 향수가 반영된 것이리라.
키리코가 형이상학 회화를 그리게 된 연유는 그가 22세의 젊은 시절 방문했던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광장에서 받은 영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나는 병적인 감수성의 상태에 처해있었다. 나의 눈에는 건물과 분수대의 대리석에 이르기까지 세상 모두가 꿈틀거리며 다시 소생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키리코가 말한 ‘다시 소생하는 세계’는 이후 그의 화폭에 전개된다. 이것은 눈으로 명료하게 구분할 수는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키리코의 대표작 <거리의 우울과 신비>의 공간은 마치 진공상태와도 같이 고요하게 멈추어버린 듯하다. 완전히 텅비어버린 도시에 등장한 굴렁쇠를 굴리는 소녀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로 존재가 확인되는 인물. 과장된 원근법이 사용된 건물과 문이 열려진 채 놓여있는 텅 빈 트레일러는 음산하고 불길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기묘한 공간에 연관성 없는 대상물들을 자신의 주관대로 배열한 작품에 대해 키리코는 “예술작품이 진실로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인간적 한계에서 벗어나야 하며, 논리나 상식은 이에 방해가 된다. 따라서 이는 꿈과 어린아이의 정신상태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키리코의 작품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형상중 하나는 마네킹이다. 중세 조각상의 일부분이나 다른 사물로의 결합으로 다시 짜 맞추어져 변형되어진 마네킹은 급속한 사회변화를 겪으며 파편화된 현대인의 의식상태를 암시하며 인간의 실존성을 대변하고 있다. 이는 키리코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책에서 받은 영향의 반증된 것이다. 인간의 내재된 잠재의식에 대한 키리코의 탐구로 그려진 ‘우연한 만남’과 ‘만들어진 공간’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예술적으로 고무시켜 결과적으로 초현실주의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그 후 이야기
1918년부터 키리코의 작품스타일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는 여지껏 추구해오던 형이상학적회화를 그만두고 라파엘로나 루벤스 등 옛 거장의 작품을 모사하거나 스스로 재현으로 회귀한 그림스타일로 전환했다. 이에 키리코를 추앙하던 화가들은 그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이자 배신자”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또한 키리코는 자신의 초기작품들을 다시 반복하여 그리고 제작날짜를 바꾸는 등 수집가들과 작품거래인들을 혼란시키는 일을 수십 년 동안 지속하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난을 등지고 스스로 은둔자와 같은 노년을 보내던 키리코는 90세의 나이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어쩌면 키리코는 자신이 창조한 그림 속 ‘이상한 세상’이 두려워져 스스로 탈출을 시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화풍을 변화시키긴 했지만 입체파나 미래파 등 객관적이고 진보적인 그림만이 대세로 평가받던 때, 반대로 신비적인 내면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하나의 무대와도 같이 연출된 작품을 전개하여 초현실주의의 발판을 마련한 키리코의 지대한 공로만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인정받고 있다.
전정은
미술칼럼니스트
국민대학교 의상디자인과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교육과 석사. 누구나 흥미를 가지고 어렵지 않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을 구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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