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김현정의 그림 라디오(11)] 작업초기, 내면의 자신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해

바람아님 2015. 9. 29. 01:42
조선일보 : 2015.09.14

<내숭 : 내면의 초상 / Feign : Portrait of inner ego / 裝相 :內面肖像> (부재: 화장품브랜드 ‘아티스트 리’ 콜라보레이션 내숭 : 내면의 초상) 김현정 작가는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전공.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내숭’이라는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주제를 한복과 함께 참신하게 표현해 한국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www.kimhyunjung.kr

 


“작업의 인물이 작가님과 닮았네요?”

작품 앞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그렇다.
작업 속 인물은 나 자신이다.

내숭 이야기의 출발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희화화는 것에서부터였다. 과도한 기대를 가지고 나를 평가하려는 사람. 본인의 의지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나에게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키려는 사람. 나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나에 관한 소문들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이를 전하는 사람, 또, 이를 통해 나의 정체에 관하여 함부로 단정 짓는 사람.... 그들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그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인체 모델이 필요했고, 어렵지 않게 가까운 곳에서 모델을 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24시간 관찰해도 모델료가 공짜인 ‘나’자신이었다.
때문에 초기에는 ‘김현정=내숭녀’ 라는 명제를 부정하며 작업을 하였다. 초점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먼저 말한다.
내숭녀는 김현정이라고.

자아에 대한 관념과 고민, 그리고 일상적인 모습들을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내숭’시리즈의 전반적인 작업 내용이다. 작품 내부에 녹아있는 <내숭>이라는 주제는 나에게 오랜 관심사이자 흥밋거리였으며, 나에게 상처를 준 이들의 이중성도 결국 <내숭>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를 창작물로 표현하게 되었다. <내숭이야기>는 자아에 대한 주제가 <내숭>이라는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내숭>을 주제로 설정하게 된 데에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전환의 순간이 있다.

학부시절, 과외 선생님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선생님의 중요한 임무였지만, 부모님과 자식에 간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였다. 수능 전이라는 스트레스로 가득한 시간이라 그런지 학생은 부모님에 대한 불만이, 부모님은 학생에 대한 불만이 극대화된 상황이었다. 당시 굉장히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결국 학생과 부모님의 불만은 모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부모와 자식이 닮았다.’라는 점을 새삼스레 느끼면서, 어떤 사람이 너무 밉다면, 그는 사실 ‘나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나를 인체 모델로 삼은 타인’을 그리고 있던 중, 우연처럼 거울로 시선이 닿았고, 멍하니 그 것을 바라보았다. 그때, 무엇인가가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타인이라고만 생각했던, 심지어 미워하던 대상이었던 나의 작품 속 인물들은 사실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나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들은 사실 나 자신과 너무 닮아 있었고, 때문에 나는 그들을 미워했던 것이었다. 나는 타인으로 가장한 나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던 것이었다.

이러한 계기를 통해 타인의 이야기에서 ‘나’의 이야기로 넘어오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화면 속의 나는, ‘당당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이었고, 그 본질까지도 당시의 나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었다. 본 모습을 찾고 싶었지만 어디로 향할지를 몰랐던 나의 시선은 내면으로 집중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작업도 술술 풀려갔다. 여전히 스스로를 확고히 판명할 수는 없었지만, 타인의 시선에 속박되어 있는 현재의 상태만큼은 솔직하고 당당하게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진행하게 된 작업인 만큼, <내숭 시리즈>가 자화상인 동시에 풍속화라는 관점으로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풍속화라 함은, 타인들의 모습, 고로 나의 모습을 통해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적인 소품을 통해 극대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요즘 세태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있는데, 나는 요즘 사람들(타인)이 서로의 고민을 빈번하게, 심지어 용이하게 나누면서도 이를 통한 소통이 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늘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는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또 다른 <내숭>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후 표면적 소통이 범람하는 오늘날의 세태에 대한 고민과 생각들도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 녹여낸다. 오늘날의 세태와 타인과 자아에 대한 고민이 모두 담김으로써 비로소 <내숭 시리즈>로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타인인 줄만 알았던 자신을 표현하고, 그 타인을 자신으로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고민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을 시대적 배경에 투영하면서 현대적 풍속화로 거듭나려고 한다. 나는 작품을 통해 나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었고, 이제는 시대적인 공감을 통해 ‘나의 타인’들은 물론 작품을 보는 모두를 다독이고 싶다.

김현정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