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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은 三國志 마니아였다

바람아님 2013. 4. 29. 09:20

이순신 장군은 三國志 마니아였다

    

오는 28일 탄신 468주년을 맞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애독하고 전략에 활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충무공과 제갈량(諸葛亮)을 비교한 글은 종종
있었으나, '삼국지연의'의 일부 문장을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그대로 인용한 것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충무공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21일 출간한 단행본 '이순신의 승리전략'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충무공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말의 '난중일기' 기록 중 ①밖에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에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다(外無匡扶之柱石, 內無決策之棟樑)' ②배를
더욱 늘리고 무기를 만들어 적들을 불안하게 하여 우리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增益舟船, 繕治器械,
令彼不得安, 我取其逸)는 문장을 적었다.


↑ [조선일보]

노 소장은 이 문장들이 '삼국지연의' 22회 '조조가 군대를 나눠 원소에게 맞서다'에 나오는 문장과 동일하다는 것을 찾아냈다. ①은 유비가 조조에게 대항하기 위해 원소의 도움을 요청할 때 학자 정현(鄭玄)이 써 준 추천서에 나오는 문장이며, ②는 원소가 유비를 도우려 하자 모사 전풍(田豊)이 간언한 말이다. 모두 '후한서' 등의 정사(正史)에 비슷한 문장이 나오지만, '난중일기'는 유독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표현과 똑같이 썼다는 것이다.

노 소장은 "1594년 9월 장문포 해전 직후 일본군과의 해전이 소강 상태에 들어간 시기에, 충무공이 인재를 모으고 배와 무기를 늘리는 등 다시 닥칠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는 의미"라며 "'삼국지연의'가 충무공의 전략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노 소장은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이 번역한 18세기 학자 성대중(成大中)의 저서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도 관련 기록을 찾았다고 말했다. 전쟁이 나자 충무공의 친구 한 사람이 '이 책을 숙독하면 일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삼국지연의'를 보냈고, '충무공은 이 책에서 효험을 얻은 것이 많았다(公之得力於此者爲多)'는 것이다.

최근 단행본 '흔들리는 마흔, 이순신을 만나다'를 낸 이순신 연구가 박종평씨도 충무공의 장계에 나오는 '성공과 실패, 이익과 해로움이 어떨지 신은 미리 헤아릴 수 없습니다(而至如成敗利鈍, 非臣所能逆料)'라는 문장이 제갈량의 '후출사표' 끝부분과 비슷하다는 것을 밝혔다. '후출사표'는 정사 '삼국지' 배송지 주(注) 등에도 이미 나온 글이지만, 충무공이 '삼국지연의'를 통해서 이 글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우리가 보통 '삼국지'라고 부르는 '삼국지연의'는 14세기 중국의 나관중(羅貫中)이 지었다고 알려진 소설. '조선왕조실록'엔 1569년 선조가 '장비의 고함 소리에 만군이 달아난다'고 하자 기대승이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허망한 책이라고 들었다'며 면박을
줬다는 대목이 있다. 이에 따라 학계에선 16세기 중반쯤엔 '삼국지연의'가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