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꿈은 천재들의 별자리에 내 이름을 올리는 것입니다.” 19세기 중반 ‘모스 부호’를 개발, 전기통신 혁명을 이끈
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의 어릴 적 꿈은 과학자나 발명가가 아니었다. 그가 부모님께 쓴 편지 내용에 들어 있는
‘나의 꿈’은 화가였다.
모스는 222년 전(1791년) 오늘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아버지가 목사이자 지리학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바람대로 예일대에 입학했지만, 그의 관심은 온통 그림뿐이었다. 대학 졸업 뒤 영국 유학을 다녀와 초상화가가 됐다.
초상화 고객이던 귀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미국 국립디자인아카데미 초대원장을 맡는 등 예술가로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40세 때 유럽에서 내놓은 역작 ‘루브르 미술관 전시실’이 화단으로부터 외면받자 붓을 꺾었다.
그가 통신발명가로 변신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던 배에서 당시 새로 발견된
‘전자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34세 때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마차로 뒤늦게 전해 들어 임종도
지키지 못한 그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로부터 6년,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전신부호 체계를 개발하고 1844년
워싱턴과 볼티모어 간의 첫 전신통신에 성공했다. 제품이 상용화되면서 모스는 명성과 부를 함께 거머쥐었다.
한순간에 거부가 된 모스. 대학과 종교단체, 그리고 가난한 예술인들을 후원하며 여생을 보냈다. 1872년 뉴욕
자택에서 81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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