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책·BOOK

[김대식의 북스토리] 왜 매일마다 저녁일까

바람아님 2015. 11. 23. 09:32

(출처-조선비즈 2015.06.27 김대식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조선비즈가 새로운 연재물로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의 책 칼럼 'Book Story'를 선보입니다. 

최근 갈수록 관심이 커지고 있는 뇌과학과 인공두뇌 전문가로 유명한 김 교수는 책을 좋아하고 즐기는 다독가이기도 합니다. 

전공 분야인 과학 도서는 물론 인문, 예술 분야에도 폭넓은 관심을 갖고 독서를 즐깁니다. 

앞으로 격주 토요일마다 연재될 새 칼럼을 통해 국내외 신간 화제작 및 고전은 물론, 책의 저자, 

김 교수의 독서 편력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들려 드릴 것입니다. 

성원을 바랍니다. [편집자주])


김대식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1894년 1월 도나우강. 추위가 뼈 속까지 파고드는 어느 날 4살짜리 어린아이가 강물에 빠진다. 
강변에서 친구들과 '카우보이와 인디언' 놀이를 하다 미끄러진 것이다. 
물살은 빨랐고 차가웠다. 아이의 운명은 여기까지였을까. 
청년이 되어보지도, 사랑을 경험해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아니, 아이의 삶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물에 빠진 아이를 발견한 옆집 주인 아들. 어린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수영에 능숙한 아들은 
혼수상태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데 성공한다. 
죽었다 살아난 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는 아이를 보며 울었고, 우는 엄마를 보며 또다시 울기 시작한 
아이는 엄마에게 혼난다. 아이는 학교에 입학하고 화가가 되길 원한다. 
하지만 미대 입학에 실패한 아이는 군인이 되고, 전쟁에 패배한 고향으로 돌아와 노숙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는 결심한다. 
혼란과 분노에 빠진 고향을 구원하겠다고. 아이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만약 히틀러가 4살 때 도나우강 시체로 인생을 마무리지었다면? 
나치당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2차대전은 시작되지 않았을까? 
6백만명의 유대인도, 5천만명의 민간인도 죽을 필요가 없었을까? 
1894년 한 젊은 청년의 용기와 수영 실력이 세상 역사를 바꿔버린 것일까?

인생은 우연과 필연의 합작이다. 그리고 우연은 언제나 아이러니를 잊지 않는다. 
유명 독일 여성 작가 제니 에르펜벡크(Jenny Erpenbeck)의 소설 'Aller Tage Abend(매일마다 저녁)'는 끝없이 질문한다: 
“만약에…..”라고. 
1902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소설 속 주인공은 잠자다 숨을 멈춰 8개월만에 죽는다. 
유대인 여자와 결혼한 후 가족으로부터 외면 받던 아빠는 죽은 아이의 엄마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이의 죽음은 어쩌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해 기회의 대륙 미국으로 떠난 남자와 고향에 남은 유대인 여자. 가족의 반대와 사회의 편견마저도 
막을 수 없었던 그 둘의 사랑. 사랑은 아이를 만들었고, 겨우 8개월된 작은 아이는 얼마 후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질 
작은 숲 속 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아이는 죽지 않았다. 숨소리를 내지 않는 아이를 발견한 아빠 덕분에 아이는 살았고, 아빠는 가족을 버리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수도 빈으로 이사간 아이는 17살이 되었다. 
비정하고 불평등한 사회에서 '갑질'하며 살기에는 가진 게 너무나도 없지만, 평생을 '을'로만 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걸 
알아버린 그런 17살 말이다. 영원한 혁명과 사랑을 꿈꾸던 아이는 사랑도, 혁명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마에 총을 대고 자살한다. 하지만 자살한 아이는 죽지 않았다. 
어른이 된 아이는 소설가가 되고 가족을 버리지 않은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죽는다…

저자 ; Jenny Erpenbeck
독일어:
에르펜베크의 소설은 쉬지 않고 상상한다. 만약에, 만약에…. 
너무나도 사소한 우연과 말하기 조차 부끄러운 치사함으로 가득 찬 인간의 인생. 
한 사람의 침착함이 수 천 만 명의 운명을 좌우하고, 
이마 땀 한 방울이 머리에 겨둔 총알을 비켜나가게 한다. 
모든 우연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영원히 살 수 있기에 죽음이 의미 없는 신들과 
자신도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고 있는 동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우리 인간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선 
유일하게 죽음이라는 모든 우연의 숙명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우리. 
우리는 항상 언제라도 끝났을 수 있는 
우리 존재의 끝을 잠시 동안만 연기할 뿐이다.

 저자 ; Jenny Erpenbeck 독일어: "Aller Tage Abend", Albrecht Knaus Verlag 
영어: "The End of Days", New Directions




[김대식의 북스토리]


[김대식의 북스토리]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신이 되어 버린 인간의 새 종교는 '데이터교'(2016. 9. 19)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9/12/2016091201052.html


[김대식의 북스토리]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장미의 '이름'은 무엇인가(2016. 9. 4)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29/2016082901158.html


[김대식의 북스토리] 보르헤스 <원형의 폐허들>-인생의 그리움과 사랑, 나 자신조차 시뮬레이션은 아닐까(2016. 8. 21)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11/2016081101925.html


[김대식의 북스토리] 《로지코믹스》-러셀의 수학탐구 과정을 논리와 만화로 유쾌하게 풀어내다(2016. 8. 7)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03/2016080301317.html


[김대식의 북스토리] 시머스 히니 번역 《Beowulf》-베오울프는 누구인가(2016. 7. 10)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7/07/2016070701013.html


[김대식의 북스토리] 괴츠맨 《Money changes everything》-돈이 없다면 세상이 행복할까?(2016. 6. 26)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6/20/2016062000698.html


[김대식의 북스토리]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무엇을 기다리는가?(2016. 6. 12)


[김대식의 북스토리] 칼비노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 책이라는 우주(2016. 5. 29)

[김대식의 북스토리] 《알렉산더 그늘 아래의 다리우스》-누구를 존경해야 하는가(2016. 5. 15)

[김대식의 북스토리]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랭보는 행복했을까?(2016. 5. 1)

[김대식의 북스토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잃어버린 책 '시학2'...웃음의 미학(2016. 3. 27)

[김대식의 북스토리] 보스트럼의 초지능(2016. 3. 20)


[김대식의 북스토리] 나의 집은 어디인가(조선일보 2016.03.06)

[김대식의 북스토리] 움베르토 에코 기획 <중세>. 문명과 미개의 차이(조선일보 2016.02.21)

[김대식의 북스토리]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나라2(조선일보 2016.02.07)

[김대식의 북스토리] 제국이란 무엇인가(조선일보 2016.01.31)

[김대식의 북스토리] 과거는 잊혀져야 하는가(조선일보 2016.01.17)


[김대식의 북스토리] 위대한 질문들(조선일보 2016.01.03)

[김대식의 북스토리]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조선일보 2015.12.13)

[김대식의 북스토리] 피네간의 경야(조선일보 2015.11.29)

[김대식의 북스토리] 미메시스(조선일보 2015.11.08)

[김대식의 북스토리] 거장과 마르가리타(조선일보 2015.10.31)


[김대식의 북스토리] 지옥은 다름아닌 타인들이다(조선일보 2015.10.17)

[김대식의 북스토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조선일보 2015.10.03)

[김대식의 북스토리] 해를 주지 말아라(조선일보 2015.09.19)

[김대식의 북스토리]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대답(조선일보 2015.09.05)

[김대식의 북스토리]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책 '코덱스'(조선일보 2015.08.23)


[김대식의 북스토리] 프로코피우스의 '비밀역사'(조선일보 2015.08.08)

[김대식의 북스토리] 전쟁은 왜 필요한가(조선일보 2015.07.25)

[김대식의 북스토리] 정보는 왜 증가하는가(조선일보 2015.07.11)

[김대식의 북스토리] 왜 매일마다 저녁일까(조선비즈 2015.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