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科學과 未來,環境

[박정훈 칼럼] '줄기세포 샤워실'의 바보들

바람아님 2015. 12. 4. 07:50

(출처-조선일보 2015.12.04 박정훈 논설위원)

줄기세포 조작 '황우석 트라우마'에 관련 산업 연구 10년째 손발 묶여
국내 개발 치료제, 식약처는 뭉개는데 일본에서는 두 달 만에 승인 떨어져
美·日은 규제 풀고 연구비 지원 '올인'
우리만 윤리 집착, 줄기세포 후진국 돼

박정훈 논설위원 사진줄기세포 조작 사건의 주인공 황우석 박사가 중국 업체와 합작해 복제 소[牛] 대량생산에 나선다는 
발표가 있었다. 뉴스를 몰고다니던 황 박사가 오랜만에 등장했으나 바이오 업계 반응은 시큰둥했다. 
전 세계에서 진행 중인 줄기세포 전쟁의 주무대는 사람의 치료 분야다. 
동물 복제는 주변부에 불과하다. 황 박사는 지난 10년간 인간 줄기세포 연구를 못 했다. 
그는 더 이상 메인 플레이어가 아니고, 학계가 주목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황우석의 존재감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트라우마는 여전하다. 
한 바이오 업체가 버거씨병이라는 희귀 질환의 줄기세포 치료제를 개발해 희귀 의약품 지정을 신청했다. 
그런데 식약처는 자료 보완을 계속 요구하면서 8개월째 뭉개고 있다. 
이 업체가 똑같은 신청을 일본에 냈더니 두 달 만에 승인이 떨어졌다. 
한국 식약처로선 안전성에 100% 확신이 있어야 허가한다는 입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후생노동성은 자국민 안전을 내팽개친 바보인가. 
결국 국내 환자들이 비행기 타고 일본에 가서 치료받는 코미디가 벌어졌다.

한국은 안 되는데 일본에서 되는 것은 바이오 산업에 대한 철학 차이 때문이다. 
같은 재생 치료제라도 한국에선 임상시험을 거쳐 인허가를 받아야 환자에게 투약할 수 있다. 
반면 일본은 시판 허가 전이라도 의사 책임 아래 쓸 길을 열어 두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희귀 질환자나 말기 중증 환자들은 부작용을 감수하고라도 치료받기를 원한다. 
이런 환자들에겐 약간의 리스크가 있더라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일본 방식이 합리적일 것이다. 
100% 안전성을 요구하는 한국식 완벽주의가 의학 원론으론 옳을지 몰라도 현명하진 않다.

황우석 팀이 세계 최초라고 주장했던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가 조작으로 드러난 것이 10년 전이었다. 
이후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는 암흑기를 맞았다. 정부 지원이 줄어들고 규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법제도가 바뀌었다. 
앞서가던 우리가 스스로 손발을 묶은 셈인데, 그 사이 미국과 일본이 치고 올라왔다.

2007년 일본 교토대 팀이 유도만능줄기세포(iPS) 실험에 성공해 노벨상까지 받았다. 
그리고 2013년엔 미국 오리건대 팀이 '진짜' 세계 최초의 복제 줄기세포를 수립했다. 
10년 전 황우석 팀이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황우석 팀이 수립한 줄기세포주(株)는 가짜였지만 
방법론 자체는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된 셈이었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 컸다.

지금 한국엔 배아(胚芽)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곳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부분 연구팀이 윤리 논란을 피해서 활용도가 떨어지는 성체(成體) 줄기세포에 매달려 있다. 
하지만 줄기세포의 꽃은 역시 배아 줄기세포다. 
어떤 장기(臟器)도 만들 수 있는 데다 면역 거부 반응이 적어 마법의 의술로 불린다. 
현재 미국에선 수백개 팀이 여기에 뛰어들어 연구를 진행 중이다. 한국에선 차병원 한 곳뿐이다.

차병원 팀은 2009년부터 3년간 줄기세포 연구를 진행했지만 실패했다. 
그런데 실패 이유가 기가 막혔다. 줄기세포 배양에 필요한 난자(卵子)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건이 터지자 정부는 생명보호법을 고쳐 갓 채취한 신선한 난자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연구자는 냉동된 난자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냉동 난자는 해동해도 줄기세포가 제대로 배양되지 않는다. 
계속된 실패 끝에 차병원 팀은 3년 만에 연구를 접었다.

대신 연구 기반을 미국으로 옮겼다. LA에 있는 차병원을 통해 미국인과 교포 등의 난자를 기증받아 실험에 썼다. 
미국에선 기증자의 의사만 확인되면 신선한 난자를 사용할 수 있다. 결국 차병원 팀은 지난해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오리건대에 이어 세계 두 번째였다. 
그리고 한 달 전엔 2~3%에 불과하던 성공률을 7.1%까지 끌어올리는 개가를 올렸다. 
대단한 성과지만 국내에서 연구를 계속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란 점에서 입맛이 썼다.

전 세계에서 줄기세포 규제가 가장 심한 나라가 한국이다. 
미국·일본 등은 규제를 풀고 연구비를 물 쓰듯 지원하며 올인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바이오 분야의 미래 먹거리가 몇백배는 더 절실한데도 생명 윤리 논리에만 집착하고 있다. 
남들은 죽어라 뛰는데 도덕적 명분만 따지다 줄기세 포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지금 우리의 줄기세포 규제는 '샤워실의 바보' 같다. 
샤워기에서 찬물이 나와도 현명한 사람은 좀 기다리는 법이다. 
꼭지를 급하게 막 돌리다가 뜨거운 물에 데이고 마는 것이 바보다. 
황우석 사건에 너무 놀란 나머지 우리는 바이오의 샤워 꼭지를 지나치게 규제 쪽으로 돌려 버렸다.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는데 말이다.


[[사설] 국내 줄기세포치료제가 일본서 승인받는 현실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