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8.07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칭송받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김응서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위상은 역사에서 말소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남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여진족과 맞서 싸운 기이한 운명의 전쟁영웅 김응서를 조선 민중은
남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여진족과 맞서 싸운 기이한 운명의 전쟁영웅 김응서를 조선 민중은
'임진록'이라는 소설을 통해 일본을 정복하는 복수의 화신으로서 기렸다. 가톨릭을 앞세워 서양 세력이
일본을 침략해올 것을 두려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치하에서 일본인들은 가톨릭교도였던
아고스티뇨(Agostinho) 고니시 유키나가를 잊어갔다. 그러나, 중세 일본에서 한 때 세력을 떨친
가톨릭교의 상징적 존재였던 고니시는 유럽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에 관한 사적은 일본보다 오히려 유럽에 더욱 많이 남아 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서 싸운
고니시의 죽음은 순교로서 유럽인들에게 각인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1558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중세 일본의 중심 도시였던 사카이와 교토에서 활동하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1558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중세 일본의 중심 도시였던 사카이와 교토에서 활동하던
요아킴(Joaquim) 고니시 류사(小西隆佐)라는 거상이었다. 고니시 류사를 중심으로 한 고니시 일족은 모두 가톨릭교도였으며,
이들은 교토 일대에 가톨릭을 포교하는 중심 세력이었던 것 같다.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이러한 집안 분위기로 인해
자연스럽게 가톨릭교도가 되었다. 오늘날의 서일본 오카야마 등에 해당하던 비젠 지역을 지배하던 우키타(宇喜多) 집안을
모셨다가, 우키타 집안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귀순하면서 히데요시를 모시게 되었다.
중세 일본 최대의 항구도시였던 사카이, 그리고 일본의 주요한 수로(水路)인 세토내해를 장악할 수 있는 비젠 지역에서
중세 일본 최대의 항구도시였던 사카이, 그리고 일본의 주요한 수로(水路)인 세토내해를 장악할 수 있는 비젠 지역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고니시는 히데요시 정권의 수군(水軍)을 통괄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당시 고니시의 권력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는 1584년에 로마에 보낸 문서에서 “(세토내해의 거점인)
시아쿠와 사카이 사이를 오고가는 선박을 감독하는 바다 사령관은 귀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고니시 류사의
아들 아고스티뇨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 기초자료집' 2쪽).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바다 사령관'이었다.
조선을 침략하는 일본군의 선봉에 서서 대한해협을 건너온 고니시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
▲ 고니시 유키나가가 다스리던 구마모토현 우토시에 세워진 동상. 가슴과 어깨의 십자가가 인상적이다. 역사소설가 기리노 사쿠진(桐野作人) 제공 |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고니시의 인생에 위기가 찾아온다.
1585년에 역시 세토내해의 거점인 쇼도시마 섬을 히데요시로부터 하사받은 고니시에게 선교사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고니시가 세속 권력에만 관심을 갖고 가톨릭 포교에는 무심하다고 비판했다. 고니시는 히데요시가 가톨릭 포교에
경계심을 표하고 있던 와중에 공개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내세우거나 포교를 조장하는 행위를 삼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니시가 이처럼 주의깊은 태도를 취한 것은 선례가 있기 때문이었다.
고니시 이전에 일본 가톨릭계를 지도하고 비호하던 사람은 주스토(Justo) 다카야마 우콘이었다. 1587년 7월, 규슈 지역을
고니시 이전에 일본 가톨릭계를 지도하고 비호하던 사람은 주스토(Justo) 다카야마 우콘이었다. 1587년 7월, 규슈 지역을
정복하러 군대를 이끌고 온 히데요시는 규슈 일대에서 가톨릭이 무시못할 세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일본은 신국(神國)이므로 가톨릭은 필요없다”는 내용의 서한을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보내면서
선교사들에게 일본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우콘에게는 “가톨릭을 버리면 우대하겠지만, 신앙을 지킨다면 모든 관직을 박탈하겠다”며 신앙과 권력 가운데
동시에 우콘에게는 “가톨릭을 버리면 우대하겠지만, 신앙을 지킨다면 모든 관직을 박탈하겠다”며 신앙과 권력 가운데
양자택일할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명령에 우콘은 “제가 믿는 종교가 어찌 주군의 명령보다 중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무라이 된 자는 한 번 뜻을 세웠으면 바꾸지 않는 것이 대장부다운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재검증 고니시 유키나가' 17-18쪽).
충성된 신하였던 우콘이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는 모습에 더욱 더 가톨릭을 경계하게 된 히데요시는
충성된 신하였던 우콘이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는 모습에 더욱 더 가톨릭을 경계하게 된 히데요시는
본보기로서 정말로 우콘의 가산 일체를 몰수해버렸다.
한때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우콘은 이리하여 일본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종교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종교와 현세 이익이 정면으로 충돌할 때에는 쉽사리 현세 이익을
오늘날에도 종교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종교와 현세 이익이 정면으로 충돌할 때에는 쉽사리 현세 이익을
취하는 모습을 자주 접한다. 심지어는 현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자기 종교의 가르침이라며 교조(敎祖)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모습까지 보면서, 필자와 같은 비종교인은 종교인들의 주장을 곱게 받아들이지 못하고는 한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다카야마 우콘과 같이 철저한 종교인이 있었다.
▲ 필리핀 마닐라에 세워진 다카야마 우콘의 동상. 그는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다가 1614년 일본에서 추방되어 이곳에서 사망했다. 위키커먼즈. |
한편, 히데요시는 가톨릭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까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일본으로 전해지는
유럽의 문물까지 거부할 심산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일본 가톨릭계의 거두였던 다카야마 우콘만 처벌한 것이며,
우콘보다 지위가 낮았던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가톨릭을 믿는 것은 터치하지 않았다. 고니시도 히데요시의 이러한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가톨릭 세력을 비호하는 행위를 일체 하지 않았는데, 선교사들은 바로 이 지점을
비판한 것이었다.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힐문을 받은 고니시는 울면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힐문을 받은 고니시는 울면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때부터 고니시는 당시 일본을 떠돌던 다카야마 우콘을 자신의 영지로 받아들이고 선교사들을 비호하는 모습을
보였다('재검증 고니시 유키나가' 87-88쪽). 이리하여 고니시는 우콘을 대신하여 일본 가톨릭계의 거두로서 일본과
유럽에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우콘과는 달리 고니시는 히데요시라는 현실 권력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관철한다. 이상을 위해 현실을 버린 것이
그러나, 우콘과는 달리 고니시는 히데요시라는 현실 권력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관철한다. 이상을 위해 현실을 버린 것이
우콘이라면, 이상과 현실을 타협시키고자 한 것이 고니시였다. 히데요시가 예수회 선교사들의 추방을 명한 지 1년 뒤에
규슈의 우토·야쓰시로 지역으로 옮길 것을 명받은 고니시는, 히데요시가 사망하는 1598년까지 자신의 영지 내에서
가톨릭 포교를 실행하지 않다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돌아온 뒤에 맹렬히 포교를 시작한다. 주군이 포교를 금지했으니
포교하지 않았고, 주군이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나의 신조에 따라 포교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개인의 신조를 버리지는 않지만 주군의 명에도 따르고자 한 고니시의 이러한 태도는 임진왜란 7년 중에도 확인된다.
개인의 신조를 버리지는 않지만 주군의 명에도 따르고자 한 고니시의 이러한 태도는 임진왜란 7년 중에도 확인된다.
고니시가 침략군의 선봉에 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지만, 임진왜란에 관한
일본측의 문헌을 살펴보면 고니시는 어떻게든 전쟁을 막으려 했던 것 같다. 전쟁 발발 몇 달 전인 1592년 1~2월에
히데요시는 부하들에게 고니시가 조선에 건너가 있으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는 군대를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지속적으로
내린다('고니시 유키나가 기초자료집' 28-29쪽).
전후 맥락을 고려하면, 고니시는 1590~91년에 황윤길·김성일 등의 사신이 일본을 방문한 것을 조선이 항복한 것이라고
전후 맥락을 고려하면, 고니시는 1590~91년에 황윤길·김성일 등의 사신이 일본을 방문한 것을 조선이 항복한 것이라고
히데요시에게 설득시킨 것 같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조선이 항복했으니 조선을 거쳐 명나라로 진격하겠다고 주장했고,
고니시는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고 개전 직전까지 조선측과 협상을 해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거듭 확인되듯이, 조선이 일본에게 영토의 일부를 할양하고 명나라가 일본을 대등한 국가로 인정하도록
조선이 중재하라는 일본측의 요구사항은 애초에 조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유능한 세일즈맨이라도, 애초에 모순적인 거래를 성사시킬 수는 없다.
이리하여 전쟁이 시작되자, 고니시는 열심히 싸운다. 나중에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한
이리하여 전쟁이 시작되자, 고니시는 열심히 싸운다. 나중에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한
고니시가 처형당하자, 고니시는 상인 출신의 비겁한 행정 관료여서 싸움을 못했다는 소문이 일본내에 유포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일본·명 삼국의 기록을 보면 고니시는 가토 기요마사, 시마즈 요시아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함께 일본측의 용맹한 장군으로 인식되고 있다. 1592년 6월 이후 평양성을 점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대가 1593년 1월에 이여송 등의 명나라 군대와 김응서 등의 조선 군대의 공격을 받아 퇴각한 사건에 대해서도,
전쟁 당시부터 일본측에서는 고니시가 용감히 싸웠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이처럼 고니시가 전투에 서툴지 않은 위협적인
장군이었기 때문에, 김응서가 기생 계월향을 시켜 고니시 유키나가를 유인해 죽였다는 전설이 생겨났을 터이다.
자신의 신조에 따라 전쟁을 막으려 했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열심히 싸우는 고니시. 가톨릭을 믿지만 주군이 포교를
금지했으니 자신의 영지내에서 포교를 허가하지 않겠다는 방침과 상통한다.
이러한 삶의 모습을 지닌 고니시이기 때문에, 명나라 정복을 꿈꾸는 히데요시를 속이고 고니시가 심유경과 비밀리에 협상을
이러한 삶의 모습을 지닌 고니시이기 때문에, 명나라 정복을 꿈꾸는 히데요시를 속이고 고니시가 심유경과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시켰다는 기존의 통설은 최근 연구에서 부정되고 있다. 고니시의 인생을 관찰하면 그는 주군의 뜻을 어기는 타입의
인간이 아닐 뿐더러, 정말로 고니시가 히데요시를 속인 것이 협상 파탄의 원인이라면 고니시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1597년의 정유재란에 다시 참전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조선의 저항이 당초 예상보다 거세고 명나라의 참전이 예상보다
빨랐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이른 시기에 명나라 정복이라는 전쟁 초기의 목적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목표는 명나라가 일본을 대등한 협상 대상으로 인정하게 만들고, 일본군이 정복한 한반도 남부 4개 도의 실효 지배를
새로운 목표는 명나라가 일본을 대등한 협상 대상으로 인정하게 만들고, 일본군이 정복한 한반도 남부 4개 도의 실효 지배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을 조선 측에 돌려서, 조선이 명나라와 일본 간을 이간질해서 전쟁이 발발했으며,
조선이 사과의 뜻으로 왕자나 고위 관료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침략했다는 명분을 내세우게 된다.
한편, 임진왜란 중에 고니시는 진해의 웅천왜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이 거느린 가톨릭교도 일본 장병들을 위해
한편, 임진왜란 중에 고니시는 진해의 웅천왜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이 거느린 가톨릭교도 일본 장병들을 위해
세스페데스라는 예수회 선교사를 1593년에 진해로 데려왔다. 세스페데스의 사명은 조선 포교가 아닌 일본인 가톨릭교도들을
종교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편지 속에서 명확히 밝혀져 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꼬리아 왕국에 갔었는데
일본인들이 한국인과 벌이고 있는 전쟁에 나가 있는 2000명의 병사들의 고백성사를 듣고 도와주기 위해서였으며, 그곳에서
일년 간 머물고 있었습니다”.
세스페데스가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고니시의 경쟁자이자 열렬한 불교도였던 가토 기요마사 때문이었다고
세스페데스가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고니시의 경쟁자이자 열렬한 불교도였던 가토 기요마사 때문이었다고
예수회 문헌에서는 전한다('16세기 서구인이 본 꼬리아' 47-59쪽). 히데요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중하게
종교 활동을 하고자 한 고니시의 약점을 가토가 건드린 것이다. 이처럼 사사건건 충돌하는 고니시와 가토의 관계를 조선과
명나라도 알고 있었기에, 이들을 이간질해서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임진왜란이 끝난
2년 후 결국 일본에서 충돌하게 되고, 고니시가 패한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가 포로로 잡아 일본에 보낸 조선인 가운데 몇 명의 소년 소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역사에 이름을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가 포로로 잡아 일본에 보낸 조선인 가운데 몇 명의 소년 소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줄리아 오타와 비센테 권이다. 이들은 고니시의 영지인 시키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선교사 페드로 모레혼(Pedro Morejon)에게 세례를 받고 가톨릭교도가 된다.
줄리아 오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시종이 되었다가, 개종하라는 이에야스의 요구를 거절하고 고즈시마 섬으로
줄리아 오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시종이 되었다가, 개종하라는 이에야스의 요구를 거절하고 고즈시마 섬으로
유배된다. 일설에는 이곳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유배에서 풀려나 가톨릭 신앙을 지키며 전국을 떠돌다가
사망한 것 같다.
포로가 되었을 당시 12-13세의 소년이었던 비센테 권은 3천 명의 조선군을 이끌던 장군의 아들이었는데, 일본군이 한양을
포로가 되었을 당시 12-13세의 소년이었던 비센테 권은 3천 명의 조선군을 이끌던 장군의 아들이었는데, 일본군이 한양을
함락시켰을 때 신의 인도를 받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로 갔다고 모레혼은 적고 있다. 비센테 권의 재능이 출중함을 눈여겨
본 예수회 신부들은, 조선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킨다는 사명을 내려 그를 베이징의 예수회 관구로 파견한다.
그러나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4년 동안 조선에 잠입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비센테 권은 1618년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도 포교활동을 펼치던 그는 체포되어, 1626년에 나가사키에서 화형으로 순교했다('일본 키리시탄 순교사와
조선인' 194-196쪽, '우토학 연구 35 유럽 사료로 보는 고니시 유키나가, 줄리아 오타 특집호' 83-93쪽).
홀홀단신으로 이국에 끌려온 자신들에게 유일하게 위안을 준 종교를 위해 줄리아 오타와 비센테 권은 목숨을 바쳤다.
홀홀단신으로 이국에 끌려온 자신들에게 유일하게 위안을 준 종교를 위해 줄리아 오타와 비센테 권은 목숨을 바쳤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김응서와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자신들이 섬기던 국가와 주군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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