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선한 기자 = 포섭자는 독일군 정보장교인 폰 미르바하 남작이었다. 미르바하 남작은 마타하리의 뇌쇄적인 춤에 매료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마타하리와의 만남 직후 스파이로서의 자질을 발견했다.
미르바하 남작은 마타하리를 군 정보부에 천거했다. 정보부 최고 간부진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던 마타하리를 독일에서 직접 면담하겠다며 미르바하 남작에게 독일로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이런 지시에 미르바하 남작은 한사코 반대했다. 전쟁이 발발한 와중에 이미 유명인사가 된 마타하리를 독일로 데려오면 신원이 쉽게 노출될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상대편 정보기관들의 이목을 끌어 위험성이 커질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정보부 간부진도 완강했다. 결국, 미르바하 남작은 마타하리에게 독일로 와 달라고 요청했다. 요청에 따라 마타하리는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독일 국경을 넘었다.
군 정보부는 그를 중서부 프랑크푸르트로 보냈다. 그곳에는 스파이로 선발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외부와 접촉을 끊은 채 활동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을 비밀리에 가르치는 '밀봉교육장'이 있었다.
공작관은 서부지역 정보 담당자인 폰 뢰벨 소령이었다. 그는 임무와 관련한 정치적. 군사적 소양을 가르쳤다. 정작 활동에 직결되는 정보 수집과 보고 방법 등의 교육은 엘스벨트 슈레그뮐러 박사가 담당했다.
마타하리는 육안으로는 식별되지 않는 특수 잉크를 사용법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폰 뢰벨 소령은 훗날 마타하리가 관찰력이 뛰어나고 정보 보고 역시 정확한 편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슈레그뮐러 박사의 평가는 전혀 다르다. 예술가 성향이 다분할 뿐 스파이로서의 소양이 부족하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교육을 마친 그에게 독일 정보부는 첫 임무를 부여했다.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고위 인사들을 유혹해 정보를 빼라는 임무였다. 이제 스파이로서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 암호명 'H21'
마타하리에게 독일군 정보부가 부여한 암호명은 'H21'이었다. 중립을 표방한 네덜란드 국적 덕택에 마타하리는 1차 세계대전 와중에서도 유럽 전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전쟁터를 피해 보통 스페인과 영국을 거쳐 프랑스나 네덜란드에 입국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적은 독일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와 영국 방첩 당국의 눈에 띄었다. 마타하리는 1916년 스페인에서 영국을 경유해 네덜란드로 향하다 영국 방첩 당국에 일시 체포됐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 방첩 당국은 영국의 도움으로 독일군 정보부의 무전을 거의 모두 해독하고 있었다. 마타하리가 독일 정보부에 포섭된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지만, 연루자들을 더 체포하려고 모른 척했다.
밀봉교육까지 받은 마타하리가 본격적으로 어떤 스파이 활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이견이 분분하다. 미모를 이용해 프랑스군 고위 장교 등 '정보가치'가 높은 인사들을 유혹해 빼낸 정보를 독일군 정보부에 전달했으며, 이것으로 전세를 독일 쪽에 유리하게 돌리는 데 이바지했다는 것이 마타하리가 했다는 스파이 활동의 핵심이다.
이견에도 분명한 것은 독일군 정보부의 밀봉교육 과정을 거쳐 거액의 공작금을 받았다는 것과 '정보가치'가 높은 유력인사들과 숱하게 잠자리를 가졌다는 부분이다. 스파이 활동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프랑스 동부 소도시 비뗄 부분이다.
당시 그곳에는 프랑스 항공대의 상당 전력이 배치돼 있었다. 종군 간호사로 자원한 마타하리는 그곳에서 여러 조종사와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어떤 정보를 수집해 전달했는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스페인 주재 독일 대사관 무관으로 위장한 군 정보부 요원이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도 어렴풋이 활동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7년 1월 초 군 정보부 요원이 본부에 보낸 전문에서는 'H-21'이 상당히 유익한 정보활동을 했다는 보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전문 역시 프랑스 방첩 당국에 의해 해독됐다.
◇ 체포와 처형
마타하리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1917년 2월 13일 파리의 한 호텔에서 체포되면서 그의 운명도 초읽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신문 과정에서 그는 독일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하면서도, 오히려 프랑스를 위해 독일을 상대로 하는 이중간첩 활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곧이어 프랑스 언론은 "성을 무기로 한 세기의 여자 스파이 검거"라는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체포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파리에 주재하던 미국과 영국 등 외신 특파원들도 마타하리의 검거 내용을 부풀려 보도했다.
마타하리를 둘러싼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 가운데에는 지중해를 항해하던 프랑스 병력 수송선 14척이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에 격침된 것도 마타하리가 사전에 넘긴 정보 때문이라는 것도 포함됐다. 또 독일 황태자와 연인관계라는 소문도 꼬리를 물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혐의로 추가돼 기소 내용에 포함됐다. 체포된 지 5개월 만에 그는 정식 기소돼 재판정에 섰다. 독일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결과 적어도 5만 명이 그가 제공한 정보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혐의가 인정돼 총살형 선고를 받았다.
마타하리의 체포와 처형에 대해 정보 전문가 어니스트 볼크먼은 "빈번하게 일어난 군내 폭동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프랑스는 전선에서 패배에 대한 구실을 찾으려고 간편한 희생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마타하리는 그런 점에서는 적격이었다. 이제 그는 프랑스 사람들에 의해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로 묘사됐다. 미모로 프랑스 장교들을 치명적으로 유혹해 군사기밀을 모조리 빼돌려온 무시무시한 여인이 된 것"이라고 평했다.
한 마디로 국면 전환 카드의 희생양이라는 평가였다. 이런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영국 정보 당국도 지난 1999년 비밀해제한 1차 세계대전 관련 문건을 통해 마타하리가 독일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마타하리는 법정에서 스파이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성매매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절대로 반역행위는 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그를 하루빨리 처형하라는 여론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이런 주장은 오히려 생명을 단축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알몸으로 춤을 추다 첩보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실수'를 저지른 마타하리는 정작 죽어서 명성을 구가했다. 음모와 배신과 위험이 가득찬 첩보세계를 그만큼 영화처럼 만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참고문헌>
*Ernest Volkmannn, Spies: The Secret Agents Who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1994)
*Gordon Corera, The Art of Betryal: Life and Death in the British Secret Service(2012)
*Jeffrey T. Richelson, A Century of Spies: Intelligence in the Twentieth Century(1995)
*손관성, 우리는 그들을 스파이라 부른다(1999)
s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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