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2015.12.06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 천경자 화백과 관련한 미스터리는 두 가지였다. 생사 여부와 위작 논란이다. 이번에 별세 소식이 알려지면서 생사 여부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지만, 새로운 미스터리도 생겼다. 유족들, 구체적으로 장녀 이혜선 씨를 제외한 그녀의 자녀들은 엄마의 별세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 씨는 왜 동생들에게 엄마의 죽음을 제때 알리지 않았을까. 스스로 절필까지 선언하게 했던 위작 논란은 영원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미궁 속에서만 존재할 운명일까. 궁금하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 꽤 많다.
천경자 화백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천 화백의 별세 소식이 보도되고 며칠 후 벌어진 기자회견에서 출발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겠다. 최근 몇 년간 거취와 생사 논란이 있었던 천경자 화백과 함께 살던 큰딸이 미국에서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전해왔고, ‘유족’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천 화백의 장남 이남훈(팀-쓰리 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회장) 씨 부부, 차녀 김정희(미국 메릴란드주 몽고메리 칼리지 미술과 교수), 사위 문범강(미국 조지타운대 미술과 교수), 며느리 서재란(고 김종우의 처, 세종문고 대표)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저희 유족 5인은 어머니가 2015년 8월 6일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10월 19일 접하게 됐다. 장녀인 이혜선 씨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한국의 모 은행으로부터 천경자 화백의 은행계좌 해지 동의를 요구하는 전화를 받고 그제야 알게 됐다. 갑작스런 비보와 기가 막힌 소식에 슬픔과 함께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해야 할지 며칠 시름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8월 천 화백의 유골함이 서울시립미술관 수장고를 한 바퀴 돌고 갔다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아무런 장례 혹은 추모 행사도 없이, 애도의 뜻을 표할 기회도 없이 어머니를 보내야 하는지 망연했다. 장례식 유무 확인은커녕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장녀 이혜선 씨가 “엄마의 유골은 생전 강아지들과 함께 산책했던 뉴욕 허드슨 강가에 뿌렸다”는 사실을 밝히기는 했지만, 형제자매도 모르게 혼자서 어머니를 세상에 보냈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머니의 비보를 은행을 통해서, 그것도 몇 달이 지난 후에야 듣게 되었다니. 그간 거취 논란이 있어왔던 천 화백인지라 더욱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유족들은 천경자 화백이 끝내 풀지 못했던 숙제인 위작 논란도 이슈로 꺼냈다. 공소시효는 끝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궁금해하는 사건, <미인도> 위작 논란이다. 작가가 “내가 그린 작품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기관에서 진품이라고 규정하는 코미디 같은 일. 유족들은 기자회견 당시 고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위작 논란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강하게 어필했다. 그리고 늦었지만 그녀가 작품을 기증한 특별한 공간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추모식을 진행해주십사 건의했다(유족들의 청원으로 10월 30일 오전 10시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추모식이 진행됐다).
유족들의 기자회견 덕분에 천경자 화백을 둘러싼 몇 가지 의문이 남게 됐다. 장녀 이혜선 씨는 왜 동생들에게 엄마의 죽음을 제때 알리지 않았을까?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 있던 천경자의 미국생활은 어땠을까? 스스로 절필까지 선언하게 했던 위작 논란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만 남게 될 운명일까? 자녀 간의 재산분쟁이라는 억측을 낳게 할 정도로, 천경자의 작품은 금전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화가 천경자는, 그녀의 진짜 작품세계는 과연 무엇인가?
절필 선언하게 한 위작 논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미인도>가 논란에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0.26사태로 국립현대미술관이 김재규의 재산을 환수한 후 인수받았다. 천 화백은 이 작품이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닌 위작이라고 주장했고, 현대미술관은 이것이 진품이라면서 한국화랑협회에 감정을 의뢰했다. 이후 현미경 분석, 적외선과 X선 촬영 등 정밀감식을 통해 감정위원 전원 일치로 진품 판정을 내렸다. 작가는 그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진품이라고 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천 화백은 “내가 낳지도 않은 자녀를, 당신 자녀라고 윽박지르면 어떡하냐”고 결과에 대항했지만 ‘정신이 이상해져 자식도 몰라보는 어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천경자의 선택은 절필 선언이었다. 본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환멸을 느낀 천경자는 그길로 미국으로 떠났다. 작품활동도 끝났다.
그렇게 한국의 작가 하나를 잃어버리는 슬픈 일로 규정되려나 싶었지만,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8년 뒤 위조범이 자백을 하면서 다시 이슈가 됐다. 본인이 위작을 그렸다고 실토한 것이다. 위작 판명으로 코미디 같은 일이 끝나려나 싶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검찰은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고, 감정 결과를 뒤집을 만한 공신력 있는 기관이 없다는 점을 들어 적극적으로 수사를 하지 않았다.
추모식이 열린 시립미술관에서 만난 고인의 차녀 김정희 교수와 사위 문범강 교수는 “천 화백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반드시 위작 논란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원한다”면서 의지를 내비쳤다.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천 화백의 별세로 다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기관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나서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실제로 <미인도> 위조범으로 지목된 권춘식 씨를 수사했던 전직 검사 출신 최순용 변호사는 한 강연에서 “위조가 맞다고 본다”는 발언을 했고, 권춘식 씨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위조한 게 맞다. 위작사건으로 절필한 고인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추모식 이후 분위기가 환기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판명이 날지는 미지수다. 미술계는 1991년 사건 당시 진품으로 판명이 됐으며, 더 이상 재조사가 불필요한 사건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상황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천 화백의 타계를 계기로 국회에서도 <미인도>에 대한 재감정 요청이 제기됐다. 이석현 국회부의장이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앞으로 ‘천경자 미인도의 재감정 요청의 건’을 우편으로 발송한 상태다. 재감정 가능성이 열렸다는 말이다.
베일에 싸인 미국생활, 최근에는 사망설
위작사건을 계기로 천 화백은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 시절에는 흔치 않은 유학파 여성이었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그림을 배웠고, 이후에도 세계를 여행하면서 그림 작업을 했다. 그녀에게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낯선 것은 아니지만, 위작 논란으로 인한 갈등으로 선택한 길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는 미술계에 환멸을 느꼈다면서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98년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이후 미술관은 부분적으로 레퍼토리를 교체하면서 천 화백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대표작의 대부분이 이곳에 있다.
미술계에서 천 화백이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부터다. 2003년 미국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거동이 불가능해 10년 넘게 큰딸의 간호를 받으며 투병 중이던 천 화백에 대한 소문은 최근 몇 년 사이 더욱 구체적인 내용으로 돌았다.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면서 수당 지급을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 큰딸 이 씨는 예술원에 탈퇴서를 제출했다.
이때 천 화백을 둘러싼 의혹이 더욱 커졌다. 예술원은 이 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 화백의 의료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명예훼손을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예술원은 천 화백 본인의 의사를 알 수 없어 탈퇴 처리를 하지 않았다.
추모식에서 만난 차녀 김정희 씨는 “언니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수년째 지속해서 유족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어머니의 명예에 누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참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98년 미국 어머니의 집을 방문했다가 경찰로부터 제지를 당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런 직접적인 멘트가 없더라도, 가족끼리 얼마나 소통이 없었으면 엄마가 돌아가신 사실도 공유하지 않을까라는 상식적인 의문이 든다.
일련의 정황들을 되짚어 보면, 장녀 이혜선 씨와 형제들 간에 소통이 되지 않거나 깊은 갈등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마지막을 함께했으며, 유골함을 뿌리고 보관까지 한 주체자인 장녀 이 씨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자명한 일. 사실 그녀가 입을 열면 천 화백의 미국에서의 거취 논란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장녀 vs 나머지 형제들, 유가족 분쟁 왜?
어떤 접촉도 없었던 장녀 이 씨가 시립미술관에서 추모식이 끝나고 한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덕분에 몇 가지 미스터리가 풀렸다. 천 화백의 유골은 뉴욕 허드슨 강, 그러니까 그녀가 살아생전 강아지와 함께 즐겨 산책을 하던 곳에 뿌렸다. 유골함의 위치는 말하지 않았지만, 뉴욕의 작은 성당에 봉안했다는 사실만 알려졌다.
인터뷰에는 동생들과의 갈등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도 있었다. 이 씨는 “앞으로 내게 남은 일은 엄마의 유해와 작품을 지키는 것이다. 동생에게 ‘내가 집을 비워야 하니 하루만 엄마를 봐달라’고 부탁했는데도 오지 않았다. 동생들이 엄마를 모시기 힘들다고 해서 뉴욕에 머물렀다. 12년 동안 병간호를 했는데, 힘들 때는 동생들이 모른 체하다가 이제 와서”라면서 그간의 서운함을 내비쳤다. 이 씨는 어머니 천 화백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직접 주사 놓는 법까지 배울 만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녀 이 씨와 유족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서로 교류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고인의 명예를 운운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두고 작품을 둔 유산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천 화백의 그림 가치는 대폭 상승했다. 11월 10일 마감한 온라인 경매에서 고 천경자 화백의 <무제> 작품이 1천5백50만원에 낙찰됐다. 낙찰금액에 판매수수료를 더한 판매 금액은 1천8백5만원이다. 6백만원에 경매를 시작해서 시작가의 3배에 달하는 가격에 팔려, 이날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했다. <무제>는 종이에 수묵으로 그린 작품으로 가로 17.5㎝, 세로 14㎝의 작품이다.
한국미술품시가감정협회는 천 화백의 작품은 평균 호당 가격이 8천2백50만원이라고 밝혔다. 작가가 세상을 떠나면 시세가 그 이전과 달라지는 것이 미술계 관례다. 따라서 앞으로 천 화백의 작품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직 유가족의 재산 분배와 관련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쉽게 정리가 될 이슈는 아닐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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