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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교포 老사업가가 남해섬에 묻히고 싶어하는 이유

바람아님 2015. 12. 23. 00:34
뉴스1 2015-12-21

경남 남해는 고향이 아니었다. 남해 아니면 달리 살 곳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모아둔 재산도 꽤 있었다. 그런데도 나이 일흔 여섯의 그는 남해의 '독일마을'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남해가 그저 자신을 불러주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남해에서 만난 관광두레 마을기업 '독일마을 행복공동체'의 배정일 대표 이야기다. 배 대표는 1966년 독일에 파견된 광부 출신이었다. 경북 김천이 고향이라는 점만 빼면, 영낙없는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이었다. 파견나온 한국 간호사와 만나 독일에서 결혼했다.


 

 

배정일 독일마을 행복공동체 대표. © News1

 

 

배 대표는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독일에서 정착했다. 그는 "당시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이 일어나던 경제부흥기의 시대였다"며 "전자회사 필립스에 취직해 브라운관 불량 검사 업무를 하며 20년을 다녔다"고 했다. 그는 이후 주택을 직접 지어 파는 사업을 15년간 했다.


그러던 중 2000년 남해군에서 제안이 왔다.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와서 살던 분들이 고국 남해섬에 와서 정착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김두관 남해군수가 4번이나 독일로 찾아와 설명회를 열며 설득했다.

배 대표의 원래 고향인 경북 김천은 예전 살던 때와는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그는 포근한 남해의 기후에 반해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독일 자재를 직접 한국으로 날라와 집을 지었습니다. 이름을 '도이치하우스'라 지었지요."


그를 비롯해 전국 팔도를 고향으로 하는 40여명의 광부와 간호사 출신 독일 교포들이 남해에 정착하면서 2005년 '독일마을'이 생겼다. 독일마을은 멋진 경치와 이국적인 집들의 외양이 어우러지며 남해의 대표적 관광지가 됐다. 연 400만명이나 방문한다고 한다.


그런데 교포 가운데 독일에 사는 자식들이 그리워진 이들이 하나 둘씩 독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배 대표의 부인도 독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지금 독일마을엔 광부와 간호사 출신 교보들이 15명만 남았다.


배정일 대표가 독일마을 내 매장에서 소시지를 판매하는 모습. © News1

 배정일 대표가 독일마을 내 매장에서 소시지를 판매하는 모습. © News1

 

 

배 대표는 이런 상황이 안타까웠다. "이대로 세월이 흘러 우리 1세대들이 죽으면 독일마을에는 우리들이 지은 집들만 남게 됩니다." 이에 배 대표를 비롯한 1세대와 이 곳이 좋아 이주한 독일마을 사람들 20여명은 2013년 마을기업을 만들었다. 이듬해인 2014년엔 관광두레에도 선정됐다.


관광두레는 지역 주민 스스로 지역의 관광자원을 활용해 운영하는 관광사업 공동체를 말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관광두레 사업의 기본 계획과 재정지원을 맡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사업을 주관해 지역 진단 컨설팅 및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관광두레의 지역특화 콘텐츠 홍보마케팅을 돕는다.

독일마을 관광두레에선 수제 소시지와 맥주를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판매한다. 배 대표가 직접 구워준 소시지는 독일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남해 특산물인 유자와 흑마늘을 넣어 만든 맥주도 맛있었다. 매년 10월 독일마을에선 맥주 축제도 연다. 소시지와 맥주 판매로 연 매출 5억원을 올린다. 이 가운데 순이익은 약 20~30% 가량이라고 한다.


남해 의 멋진 풍광과 어우러진 이국적인 독일마을의 모습. 사진-관광공사 © News1

 남해 의 멋진 풍광과 어우러진 이국적인 독일마을의 모습. 사진-관광공사 © News1

 

 

이렇듯 독일마을은 관광두레의 대표적인 성공사례가 됐다. 그러나 배 대표에겐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 "1세대 교포들이 나이들어 모두 자식들이 있는 독일로 돌아가거나 별세하면, 이 독일마을은 그야말로 빈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그게 싫습니다."

독일 시민권이 있는 배 대표도 사실 독일이 살기가 더 좋다고 했다. "주택사업을 해서 닦아둔 기반이 독일에 여전히 있습니다. 아내가 독일에서 현지 한인회장을 하고 있고요. 친구들도 많고 골프도 치기 좋아요. 제 아들도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큰 기업에서 간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에 돌아와 함께 살자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그는 죽으면 남해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광부와 간호사 출신 1세대 교포들이 이곳에 잠들어야 우리의 자취가 남게 되고, 그래야 진정한 독일마을이 영원히 유지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일 마을의 모습. 사진-관광공사 © News1

 독일 마을의 모습. 사진-관광공사 © News1

 

 

하지만 이런 배 대표의 희망은 현재로선 이뤄지기 힘든 상황이다. "애초 독일마을을 조성할 때 교포 1세대를 위한 공원묘지도 추후 함께 만들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뒤에 지방자치단체장이 바뀌면서 허가를 해주지 않고 있어요. 독일은 한번 약속한 정책은 지키는데, 한국은 정치 상황이 달라지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요."


죽어서라도 우리나라의 부흥을 위해 일했던 독일 광부와 간호사들의 정신이 배어 있는 독일마을의 명맥을 유지하고 싶다는 희망이었다. 배 대표는 독일마을 관광두레를 위해 내년엔 독일에서 소시지와 맥주 마이스터를 직접 초빙할 계획이다.

그가 남해에 묻히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껍데기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특별한 기억이 있어야 그게 독일마을이지요."


남해 독일마을의 파독전시관의 모습. 이곳에선 1966년 시작된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생생한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사진-관광공사 © News1

 남해 독일마을의 파독전시관의 모습. 이곳에선 1966년 시작된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생생한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사진-관광공사 © News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