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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평화로에 핀 할머니의 도라지꽃

바람아님 2016. 1. 13. 00:18
한겨레 2016-1-12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이용수 할머니가 저항하자 관리자는 전화기 코드로 전기고문을 해대 실신을 거듭했다. 김군자 할머니는 일본군 장교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구타당해 오른쪽 귀 고막이 찢어졌다. 저항하던 정서운 할머니에게는 모르핀 주사를 강제로 투여했다. 그렇게 유린당하다 기진하면 ‘폐기’됐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수탈했고, 조선 반도에선 민중을 수탈했고, 최종적으로는 가난한 어린 소녀를 수탈했다. 그들은 그 모든 모순을 짊어지고 성노예로 끌려가야 했다. 그 소녀들이 아흔을 바라본다. 그들은 이제 세상의 딸들을 지키는 할머니,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할머니가 되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올해 들어 서울이 가장 추웠던 11일 밤 서울 종로구 율곡로2길.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대학생 열댓명이 노숙농성 13일째를 이어가고 있었다. 담요 속에 발과 손을 넣고 있었지만 추위에 드러난 얼굴은 하얗게 얼어 있었다. 가끔 하늘로 날아오르는 웃음소리와 함께 눈이 반짝였다. 별, 동토에 내려와 박힌 작은 별들.


대학생의 등 좌우로 의경 10여명이 2열 종대로 늘어서 있고, 그 뒤로는 기동대 버스가 배기가스 뿜어대며 웅웅거리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무전기 든 사복경찰들이 노려보고 있겠지? 12·28 합의 폐기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촉구하는 작은 펼침막들이 떨고 있었다. 10억엔에 미증유의 여성인권 유린을 말소하려는 자들은 그렇게 젊은이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평화를 염원하는 소녀상이 춥고 외로워 보였다. 초현대식 빌딩이 마천루를 이루도록 치솟았지만, 이 나라의 동토는 그대로였다.


문득 할머니들이 피눈물 삼키며 증언했던, 70여년 전 조선의 상황이 겹쳐졌다. 그때도 일제의 앞잡이들은 처녀 공출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혈안이었다. 명망가들은 조선의 청년과 소녀들을 전장에 내보내는 선동에 열을 올렸고, 이장, 구장 등 일선의 부역자들은 마을 처녀들을 속이고 꾀어 일본군 위안소로 송출하는 데 앞장섰다. 마침 그날 낮 외교부 관리들은 혼자 사는 위안부 할머니를 몰래 찾아가 감언이설을 늘어놨다던가. 12살 소녀 정소운 할머니, 16살 소녀 이용수 할머니를 속여 일본군 성노예로 넘긴 그 이장 같은 부역자들.


조선인 부역자가 국민복에 전투모를 쓴 일본인에게 넘긴 이용수 할머니는 경주의 한 여관 앞 개울가에서 본, 그 청초하고 꼿꼿했던 도라지꽃을 잊지 못한다. 할머니는 평안도 안주를 거쳐 중국 다롄에서 군용 화물선에 태워져 대만으로 실려갔다. 할머니의 그 작은 꽃은 바로 그 배 밑창 화물칸에서 짓밟히기 시작했다. ‘수송 중 배 안에서는 사용 금지’라는 경고는 순전히 장식용이었다. 이용수 할머니는 그렇게 유린당하면서도 그 꽃을 잊지 못했다. 다섯 갈래의 꽃잎엔 고향, 엄마, 아버지, 친구들이 새겨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일제 관동군 사령부는 할머니가 끌려가기 3년 전인 1941년 조선총독부에 ‘도라지꽃’ 2만개를 주문했다. 16~19살, 경험 없는 조선 처녀들을 부르는 암호였다. 총독부는 전 행정력을 동원해 처녀 공출에 나섰다. 이장, 반장까지 동원해 산간벽지까지 이 잡듯이 뒤졌다. 학교에선 교사들이 앞장서 ‘가난하지만 건강한 아이들’을 선별했다. 서울 방산초등학교의 한 일본인 교사는 제 반에서 어린아이 6명을 보냈다. 민간 알선업자들은 ‘많은 보수, 좋은 음식, 편한 일자리 제공’이라고 여성들을 속였다.

일본군의 징발 목표치는 군인 29명당 처녀 1명. 계산대로라면 30만여명에 이르는 규모. 본토 여성은 공출 대상이 아니었고, 교전 중인 나라의 여성은 현지인의 저항을 초래할 수 있어, 일본군은 식민지 조선을 지목했다. 한 일본인 노무동원업자(요시다 세이지)는 1942년부터 45년까지 제주도 등지에서 5천여명의 조선인들을 사냥했다고 실토했다. 일단 화물차, 수송선에 실린 소녀들은 ‘군수물자’로 분류되었다.


대만의 한 위안소에 도착한 이용수 할머니는 저항했다. 관리자는 전화기 코드로 전기고문을 해댔다. 몇 차례 실신을 거듭했다. 중국 훈춘으로 끌려간 김군자 할머니는 일본군 장교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구타당해 오른쪽 귀 고막이 찢어졌다. 저항하던 정서운 할머니에게는 모르핀 주사를 강제로 투여했다. 그렇게 성노예가 된 할머니는 하루 평균 30명, 많게는 100명까지 일본군을 받았다. 상습적 폭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문옥주 할머니는 칼 들고 달려드는 군인을 피하다 떨어진 칼로 그 군인을 찔러 죽이기도 했다.


그렇게 유린당하다 기진하면 ‘폐기’됐다. ‘(모르핀) 주사마저도 소용없다 싶으면 거적에 싸서 내다버렸지.’(이옥분 할머니). 중국 무단강 전선으로 끌려갔던 강일출 할머니는 장티푸스로 고열에 시달려 일본군을 받지 못하게 되자, 군용트럭에 실려 산속에 버려졌다. 일본군이 짚을 덮고 태우려던 순간 천우신조로 조선인들이 나타나 목숨을 건졌다.

패주할 때는 증거를 없애려 학살했다. 방공호에 모아놓고 폭탄을 터트리거나, 고향에 보내준다고 배에 실었다가 배를 폭파시키도 했다. 살아남은 위안부가 네명에 한명꼴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군인 생존율보다 낮았다.


요행히 돌아와도 고향은 옛 고향이 아니었다. 친척들은 ‘가문의 수치’라며 내쫓았고, 이웃들은 ‘화냥년’이라고 손가락질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을 때, 힘깨나 쓴다는 자들은 ‘민족의 수치’라고 빈정거렸다. 그래서 윤순만 할머니는 ‘정상적인 여자가 될 수 없는’ 자신을 혐오하며 살았다. 노수복 할머니나 훈 할머니는 귀향을 포기하고 중국이나 캄보디아 현지에 주저앉았다. 결혼? ‘무슨 염치로….’ 할머니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쥐어뜯었다.


이용수 할머니는 그래도 여자로 태어나 면사포 한번 써보지 못하는 게 억울했다. 환갑이 되던 해 일흔다섯살 할아버지와 결혼했다. 가슴속 그 피지 못한 꽃을 한번 피우고 싶었다. 일부러 노인을 택한 건 남성이 싫어서였다. 16살에 끌려갔던 강일출 할머니는 매일 열 손가락에 빨간 매니큐어를 칠했다. ‘한창 멋부릴 나이에 끌려간 게 한이 되어서….’ 문옥주 할머니는 1993년 일본 증언 때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입고 보도진 앞에 섰다. 일본 기자들이 대뜸 그 이유를 추궁했다. “일본군에 유린당한 소녀의 꿈은 아직 할머니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할머니 대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실무자가 답변을 했다. 그래서 나눔의집 자원봉사자 최정권씨는 2001년 1월17일 ‘웨딩드레스 입어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던 할머니들을 위해 웨딩드레스 입고 ‘젊은 신랑’들과 에버랜드로 신혼여행을 가는 행사를 주선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할머니들은 용기를 냈다. 김덕자, 이영숙, 황금주, 문필기, 이용수 할머니 등이 잇따라 증언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할머니들은 과거의 그 자책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당신들의 한을 푸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의 딸들이 다시는 그런 성노예 같은 전쟁범죄에 희생되어선 안 됐다. 정대협은 1992년 1월8일 첫 수요시위를 열었다. 할머니들은 처음엔 겉돌았지만, 7회부터 서서히 그 중심으로 서기 시작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권력자들은 일회성으로 끝나리라 낙관했다. ‘위안부’라는 그 치명적인 수치를 전면에 세우고 얼마나 더 거리에 서겠는가. 하지만 착오였다. 할머니의 한이 얼마나 컸는지, 이 땅의 딸들을 보호하겠다는 할머니들의 의지가 얼마나 굳셌는지 무지했다. 할머니들의 외침과 행진은 24년째 계속되었고, 이제 지구촌 곳곳으로 확산됐다. 1000번째인 2011년 12월14일엔 9개국 43개 도시에서 시위가 동시에 이루어졌고, 24년째 되던 1212차 시위(1월6일)엔 16개국 42개 도시의 시민들이 함께 행동했다.


1992년 아시아연대회의가 결성됐고, 1996년 유엔 인권위원회는 여성폭력문제 특별보고서를 채택했고, 1998년엔 조직적 강간, 성노예, 노예적 취급 관행에 관한 특별보고서를 채택했다. 국제노동기구는 일본군 위안소 운영을 성노예제로 규정했다. 2000년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열렸고, 2007년엔 ‘위안부 결의안’이 미국 의회를 통과했다.

세상의 고통은 최종적으로 약자에게 전가된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수탈했고, 조선 반도에선 민중을 수탈했고, 최종적으로는 가난한 어린 소녀를 수탈했다. 그들은 그 모든 모순을 짊어지고 성노예로 끌려가야 했다. 그 소녀들이 아흔을 바라본다.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그들은 이제 세상의 딸들을 지키는 할머니,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할머니가 되었다. 그들이 여성인권의 성소로 지켜온 율곡로2길, 평화로는 이제 이 땅의 젊은이들이 지킨다. 도라지꽃은 그렇게 피어나고 있다. 평화로 중간엔 소녀상이 있고, 건너편엔 주한일본대사이 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