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최보식 칼럼] 失敗의 의미

바람아님 2016. 1. 22. 09:34

(출처-조선일보 2016.01.22 최보식 선임기자)

저마다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순간 원정대는 깨진다
원정 과정에서는 어떤 고통과 불만도 의문 없이 받아들여야

최보식 선임기자쉰 살이 된 산악인은 이번에도 실패했다. 
히말라야 로체봉 남벽(南壁) 루트 등반에서 홍성택은 또 성과 없이 돌아왔다. 
같은 봉우리에만 다섯 번 도전, 다섯 번 모두 실패였다. 
그동안 들어간 시간과 열정, 원정 비용 조달 등을 떠올리면 한마디로 미친 짓을 해온 것이다.

정상(頂上)에 우뚝 서야 매스컴에 한 줄 날까 말까 한데, 등반 실패는 당연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 
이제 산악계조차 로체봉 남벽으로 매번 떠나는 그에게 관심이 식었다. 어차피 빈손으로 돌아올 테니까. 
그럼에도 '뉴스'가 안 되는 그의 스토리를 여기에 기록해두려고 한다. 
새해에는 누구나 희망을 말하지만, 대부분 우리의 현실적 삶은 실패와 좌절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성공한 사람들이 눈에 자주 띄는 것은 그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드물어서 그렇다. 
아주 예외여서 뉴스가 됐을 뿐이다. 인생의 보편적 진실은 이와 다르다. 
일반 대중에게 운 좋은 성공은 겨우 한 발짝의 진전(進展)이거나 그럭저럭 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다. 
인생길에서 눈사태 같은 실패를 모면하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홍성택은 스타 산악인 허영호·엄홍길·박영석의 '보조 역할'을 쭉 해왔다. 
그런 조역으로 남극점·에베레스트봉·북극점 원정대에 참여했다. 원정은 낭만(浪漫)이 아니다. 
원정대 내부는 격렬한 삶의 현장이다. 극한 상황에 놓이면 인간은 이기심과 생존 본능에 지배된다. 
대원 간에 불신과 원망, 적대감이 독가스처럼 피어오른다. 
젊은 날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마다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순간 원정대는 깨진다. 
원정 과정에서는 어떤 고통과 불만도 의문 없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매번 원정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걸 걸었다. 
1995년 에베레스트봉 원정에서 이런 일기를 썼다. 
"설령 내가 등반이나 탐험을 하다가 어떤 사고로 돌아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친구나 나를 아는 많은 사람이 내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애석해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어디까지나 내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2005년 북극 원정대에 참여하기 위해서 11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기도 했다. 
"인간이라면 한 번쯤 자신을 얽매고 있는 현실과 손에 쥐고 있는 빵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맞는 일과 사명을 찾아 매진할 때 비로소 행복과 존재 의미, 열정과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말은 고상하지만, 이 원정에서 그는 일곱 번이나 북극 얼음바다에 빠졌다. 
그 중 두 번은 사신(死神)과 입맞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악전고투 54일 만에 북극점에 도달했다.

마흔 중반이 됐을 때야 그는 자신의 원정대를 꾸렸다. 그린란드 종단과 베링해협 횡단에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남겨둔 그의 도전은 그전에 두 번 실패한 적 있는 로체봉 남벽으로 향했다. 
수직으로 4000m 이상 암벽이 가로막고 있는 루트였다. 
히말라야 14좌 최초 완등자 라인홀트 매스너도 두 번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세계 두 번째 14좌 완등자인 '전설'의 예지 쿠쿠츠카는 여기서 등반 도중 추락사했다.

그런 로체봉 남벽 등반에는 실패의 확률이 항상 높은 것이다. 
47세 나이로 그는 세 번째 도전을 시작했다. 실패였다. 
주위에서는 "나이도 있고 그만큼 했으니 됐다"며 위로했다. 단념할 줄 알았을 것이다. 
이듬해 그는 네 번째 도전에 나섰다. 또 실패했다. 
작년 겨울 그는 다섯 번째 떠났고 역시 빈손으로 돌아왔다. 
실패가 지긋지긋하지 않은가. 
이런 추궁에 씩 웃는 그를 보면 '올해에도 어김없이 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든다.

그렇게 올라가 정상을 밟은들 무엇을 얻겠는가. 
대차대조표를 따져보면 남는 게 없다. 더욱이 그에게서 실패는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될 수 있다. 
그런 위험한 등반 루트에 목숨 거는 어리석음을 탓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존재 증명 방식인지 모른다.

그가 실패를 거듭하듯이, 우리 대부분도 자신이 욕망하는 만큼 결코 얻지 못한다. 
세상의 바닥에는 '수저 계급론'으로 냉소하는 젊은 친구들과 날마다 좌절하는 취업 준비생들이 웅크리고 있다. 
'희망퇴직' 바람이 불면서 중년들은 중년들대로 현실의 어두운 골목으로 걸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실패는 대부분 먹고사는 일상의 테두리 안쪽에 있다. 
그 실패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경우는 드물다. 
눈앞의 실  패를 너무 크게 보거나 인생 전부가 끝나는 걸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행여 마지막까지 실패로 끝나도 그 인생 자체가 의미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실패란 자기 자신과 수없이 경쟁해온 증거라고 하지 않는가. 
요즘 세상에는 정치판·재벌·종교 어딜 둘러봐도 우리의 누적된 피로를 풀어주는 데가 없다. 
그나마 우리보다 어리석은 산악인을 보면서 잠시 위안받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