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태평로] 집이 망하자 학생의 잠재력이 폭발했다

바람아님 2016. 1. 22. 09:23

(출처-조선일보 2016.01.22 조중식 산업2부장)


20년 이상 학원을 운영한 학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한 적이 있다. 
"학생들의 대학 입시 성적은 중학교 2학년 때의 성적이 거의 그대로 가는 것 같다." 
이 학원장의 분석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다.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 말이었다. 
"예외적으로 성적이 크게 오르는 학생들이 있다. 
공통점을 뽑아보면 중2에서 고3 사이 집안에 큰 변화가 있었던 학생들이 많았다. 
좋은 변화가 아니다. 부모 중 누군가 사망하거나 실직했거나, 사업이 부도난 경우다. 
한마디로 집안이 쫄딱 망할 정도로 환경이 악화된 학생들에게서 그런 예외적인 사례가 많았다."

열악한 환경과 위기는 인간을 좌절케 하고 목표를 포기하게 할 수 있다. 
반대로 그런 환경과 위기를 타개할 창의성과 잠재력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도록 격발하기도 한다. 
우리 경제와 기업의 성장사에서도 그런 사례를 허다하게 찾아볼 수 있다.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서울의 한 입시학원. /정경렬 기자
우리 정부는 5개국의 8개 철강 회사로 구성된 '대한(對韓)국제제철차관단(KISA)'으로부터 1억달러 차관을 받아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무산됐다. 
세계은행(IBRD)의 '1968년 한국 경제동향 보고서'가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한국의 경제 규모와 산업 수준으로는 종합제철소를 성공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KISA는 이 보고서를 핑계로 차관 제공을 거부했다.

결과는 어떤가. 포스코는 KISA 차관 없이 탄생했고, 최근 6년 연속 '경쟁력 세계 1위 철강사'로 선정됐다. 
당시 IBRD 보고서는 영국인 J 자페 박사가 작성했다. 
전기작가 이대환씨가 쓴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에 1986년 박태준이 영국에서 자페를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박태준이 당시의 보고서에 대해 묻자, 자페가 답했다. 
"나는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고 운용하는 데 고려해야 할 내수 규모, 기술 수준, 원자재 공급 가능성, 
시장성을 공정하게 분석했다. 다시 쓴다 해도 똑같이 쓸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간과한 것이 있다. 당신이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여 프로젝트를 이끌었고 성공시켰다."

보고서는 예측할(predict) 뿐이지만, 인간은 창조할(create) 수 있다. 
자페가 간과한 것이 박태준뿐이었을까. 사면초가에 빠진 한국 정부와 박태준, 포스코 직원들 모두이다. 
위기 속에서 불타오른 의지와 사명감이 지금의 포스코를 만들어냈다.

새해 벽두 한국 경제엔 온통 '위기'라는 단어가 지배하는 분위기다. 
기업들은 축소 경영 일변도다. 
하지만 우리 경제와 기업의 성장은 위기와 남보다 뒤진 열악한 환경에서 발휘된 창의성과 잠재력이 주요 동력이었다. 
수비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공격하고 도전하며 길을 열어왔다.

문제는 도전을 장려하고, 그 도전이 성장으로 이어지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경영자들은 창업자 세대 기업인들이 했던 도전을 제대로 이어가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관료와 정치인들은 도전 정신이 넘치는 젊은 창업자에게 시작부터 진입 장벽을 쳐서 싹을 자르지 말아야 한다. 
온라인으로 거래하는 자동차 경매 업체도 3300㎡ 이상의 주차장과 200㎡ 경매실을 갖추도록 법을 개정해 
창업 1년 만에 업계 3위로 올라선 벤처기업을 문 닫게 하는 짓은 말아야 한다. 
도전하지 않고 제 것 지키기에만 급급한 기성 업체들의 하수인 노릇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