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6-01-23
▷1841년 10월 일본 조슈 번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하야시 리스케는 아버지가 이토 가문의 양자로 가면서 이토 리스케가 된다. 1868년 메이지 정부 출범 후 효고 현 지사가 되면서 히로부미(博文)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토는 일본인에겐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고 근대화를 이끈 영웅 중 한 명이다. 작가 도요타 조는 이토 전기에서 “일본의 근대가 이 사내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내 없이 근대는 전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했다(이종각의 ‘이토 히로부미’에서 재인용).
▷더구나 이토는 일본인에게는 안중근이란 ‘자객’의 총탄에 순국한 열사다. 놀라운 일은 이토 장례식 때 그의 죽음을 부러워하는 원로들이 많았다는 사실. “방 안 다다미 위에서가 아니라 만주 벌판에서 자객의 손에 쓰러진 것이 영광스러운 죽음이다.”(오쿠마 시게노부) 그의 초상은 가장 많이 쓰는 1000엔권(1963∼1984년 통용)에 들어 있었으며 국회의사당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동상이 있다. 조선총독부가 이토의 공훈을 기려 1932년 건립한 절이 박문사(博文寺)다.
▷서울시는 호텔신라의 한옥 호텔 건립 계획에 4번째로 제동을 걸면서 이 자리에 있던 박문사 터를 문화재 보호 대상으로 거론했다. 1939년 바로 그 박문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차남 준생이 이토의 아들 분키치에게 굴욕적인 사과를 하는 쇼가 벌어진 일을 서울시 관계자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총독부 연출쇼에서 안준생은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립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당시 한국에서 발행하는 신문 중 동아일보는 유일하게 이 화해 쇼를 보도하지 않았고, 이듬해 강제 폐간을 당하는 사유 중 하나가 된다.
박제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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