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6.01.22
이렇듯 우리는 태양력과 태음력·절기력 등이 중첩된 ‘다중우주’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늘 태과불급에 예측불허의 리듬을 연출할 수밖에. 인간의 삶 역시 그러하다. 인생은 결코 앞을 향해 매끄럽게 나아가지 않는다. 지난해의 성취가 올해도 이어지리라는 보장이 없고, 사랑의 굳은 맹세도 시간의 흐름 앞에선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끊임없이 유동하고 쉼 없이 변화하는 것, 그것이 생명이다. 그래서 불안하다고? 하지만 불안의 또 다른 이름은 ‘설렘’이다. 이토록 무상하기 때문에 매년, 매달, 매일을 다시 살 수 있으므로.
정치와 경제, 역사 또한 다르지 않다. 20세기를 주도한 깃발은 계급투쟁과 성장모델이었다. 방향은 정반대였지만 둘 다 유토피아를 약속한 점은 같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역사에 유토피아 따위는 없다는 것을. 계급투쟁에 성공해도, 초고속의 성장에 도달해도 삶의 질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술해방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이 아무리 고도화되어도 삶이 절로 고매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의 진보는 인생을 또 다른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이것이 오면 저것이 가고, 하나를 잃으면 또 다른 것을 얻게 되는 것이 시공의 섭리이므로.
하여 인간은 길 위에 나서야 한다. 아니, 인생 자체가 곧 길이다. 한 곳에 머무르면서 안정과 복락을 기다리는 건 무의미하다. 시공이 움직인다면 한 발 앞서 나갈 뿐이다. 목적도 방향도 필요 없다. 다만 갈 수 있으면 된다. 카프카의 말대로 “여기에서 떠나는 것, 그것이 나의 목적지다.”
특히 병신년은 역마의 해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길 위를 떠돌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칠 것이다. 하여 더 많은 이들이, 더 많은 곳으로 흘러가고 또 흘러올 것이다.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유목이다. 이미 정해진 코스를 맴돌다 다시 ‘떠나기 전’의 길로 되돌아온다면 그것은 유랑이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역마살은 유랑이 아닌 유목을 향한 우주적 충동이다. 그 충동에 감응하려면 지도가 필요하다.
가장 멋진 내비게이션이 로드클래식(여행기 고전)이다. 『일리아드』 『오디세이』와 『서유기』 『걸리버 여행기』 『그리스인 조르바』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 몇 년 전부터 국경을 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면서 로드클래식이 내게로 왔다. 『고미숙의 로드클래식』(북드라망)이 그 첫 번째 성과물이다. 여행기 고전에 담긴 길은 넓고 깊었다. 한 권의 책 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건과 사상이 웅성거렸다. 그리고 나를 다시 길 위로 내몰았다. 거침없이 대책없이! 그 이야기를 앞으로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워밍업 삼아 나누고 싶은 한마디. 인생이라는 길을 탐구하면서 루쉰은 이렇게 말한다. 길 위에서 쉽게 직면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갈림길. “묵자는 통곡을 하고서 돌아섰지만 나는 울지도 돌아서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 “갈림길 머리에 앉아 조금 쉬거나 한숨 잔다. 그런 뒤 갈 수 있어 보이는 길을 택해 간다. 만일 진실한 사람을 만나면 그의 먹을 것을 조금 빼앗아 배고픔을 면할 것이다. 하지만 길을 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면 일단 도주하고 숨을 것이다. 그것도 안 되면 “잡아먹으라고 하는 수밖에.” 막판에 “호랑이를 한번 물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 다음은 막다른 길. “완적 선생도 크게 울고 돌아섰”다지만 계속 나아갈 것이다. 한동안 “가시덤불 속을 걸을 것이다.” 하지만 “온통 가시밭이고 갈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그런 곳”은 없다. “세상에 본디 막다른 길이란 없”다. “아니면 내가 운이 좋아 만나지 못했거나.”(『양지서』)
고미숙 고전평론가
◆ 약력 : 고려대 국문학 박사. 고전평론가. 인문학공동체 ‘남산강학원&감이당’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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