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약장사 둘카마라가 도착한다. 만병통치약을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자 네모리노는 아디나가 읽던 책을 생각한다. 그것은 사랑의 묘약에 관한 것이었다. 네모리노의 얘기를 듣고 눈치 빠른 둘카마라는 자신의 발명품(실은 싸구려 포도주)을 건네준다. “이 약을 먹어 봐. 하루만 지나면 동네 처녀들이 모두 당신을 줄줄 따라다닐 거야.”
마셔 보니 기분도 좋아지고 약간의 용기도 생긴다. 네모리노는 약 기운이 제대로 작용하기를 기다리며 아디나를 보고도 태연한 체한다. 그 꼴을 본 아디나는 기분이 상해 마침 나타난 벨코레에게 “기다릴 것 없이 오늘 저녁 당장 결혼해요” 하고 제안한다(희극에서는 종종 이런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다).
네모리노는 급해진다. 하루만 기다리면 약효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당장 오늘 저녁에 아디나가 결혼한다니 급처방이 필요하다. 아까 마지막 금화를 썼으므로 할 수 없이 입대신청서를 쓰고 위로금을 받아 그 돈으로 묘약을 산다. 잔뜩 마시고 얼큰해졌는데 동네 처녀들이 그에게 몰려든다. 그것은 약 기운 때문이 아니라 네모리노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다른 마을에 살고 있던 그의 삼촌이 많은 유산을 남기고 죽었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전해진 때문이었다.
결혼식을 하려고 공증인을 불러다 놓고 계약서를 준비하고 있는데도 네모리노가 나타나지 않자 아디나는 짜증이 난다. 잠시 결혼을 미루고 밖으로 나와 보니 네모리노가 동네 처녀에게 둘러싸여 있다. 게다가 인기가 보통 아니다. “이건 또 뭐야?” 분해 하는 그녀에게 둘카마라가 자랑 삼아 말한다. “저 총각이 나한테서 묘약을 사 먹더니 저렇게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다오. 아디나라는 처녀를 좋아해 군대에 갈 각오를 하고 입대위로금을 받아 약값을 치렀지.”
이 말에 아디나의 마음을 겹겹이 싸고 있던 무장이 해제되면서 네모리노의 사랑이 뜨겁게 그녀에게 전해진다(이후의 내용은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을 보면 된다. 유명한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도 들을 수 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오페라 버전이랄까? 우직한 사랑이 영리한 계산을 이긴다는 내용이다. 현실과는 한참 동떨어졌다. 등장인물도 그렇고 내용도 바보스러운데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중 하나다. 경제가 모든 것을 좌우하고, 상대평가에 의해 낙오자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남을 딛고 올라서야 하는 오늘날에도 그렇다. 오히려 더 사랑받는 작품이 되는 듯하다.
겸손, 인내, 숨은 선행, 희생,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 같은 것은 이제 현실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이것을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부모들이 과연 있을까 싶다. 혹여 그 가르침대로 살다가 아이들이 실패자가 되기 똑 알맞은 세상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은 영악스러운 사람이 최종 승리자가 되는 오페라나 숨은 선행이 끝끝내 짓밟히는 연극을 보러 가진 않는다. 우리가 찾는 것은 이런 약이 아니다. 엉터리 같지만 ‘사랑의 묘약’이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혹은 “욕심을 버려라.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라는 말은 루저의 논리의 극치일 터인데 사람들은 오히려 이를 들으러 교회나 절을 찾는다. “돈이 너희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라는 말이 맞더라도 이를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기엔 우리가 삶에 너무 지쳐 있다. 그래서 이따금 ‘묘약’을 먹고 기운을 차려 다시 한번 현실이라는 아디나에게 도전해 보는 것이리라. 네모리노들이여 힘을 내라!
이건용 작곡가·서울시오페라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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