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1.23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눈밭에 쓴 편지 눈빛이 종이보다 새하얗기에 채찍 들어 이름 석 자 써 두고 가니 바람아 부디 눈을 쓸지 말고 주인이 돌아오기 기다려다오. | 雪中訪友人不遇 |
고려의 문호 이규보(李奎報·1168 ~1241)가 30세 전후하여 지었다.
공직에 진출하지 못해 불안과 불만의 세월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말에 올라타 친구를 찾아갔으나 친구는 외출하여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雪中訪友人不遇)
하지만 그는 집 안에 들어가 기다리지도 않았고, 또 그냥 돌아오지도 않았다.
발길을 되돌려 나오다가 집 앞 하얀 눈밭에 제 이름 석 자를 써놓았다.
그리고 바람에게 당부하였다.
주인이 돌아와서 볼 수 있도록 내 이름을 덮어버리지 말아 달라고.
눈 속에 친구를 찾아간 것도 운치 있는 일이지만,
그 집 식구가 아닌 눈밭에 내가 왔다 가노라는 사연을 명함처럼 박아놓은 것도 운치 있는 일이다.
집에 돌아온 친구가 그 이름을 보고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 젊은 친구들에게는 직접 만나 쏟아놓을 한없는 사설보다 순백의 설원에 써놓은 무언의 대화가 더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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