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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 너머… 19세기 '아랍 르네상스'의 부활을 꿈꾼다

바람아님 2016. 5. 15. 06:15

(출처-조선일보 2016.05.14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중동정치학))

오스만제국서 '아랍의 봄'까지 500년史, 아랍의 시선으로 기술… 카다피·빈라덴 등 뒷얘기도 풍성
英, 아랍 지배하며 통합 꾀했지만 문예부흥 막고 혼란만 가중시켜
제2의 중동 붐, 석유·건설에 앞서 역사의 이해로부터 시작되어야

'아랍: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혁명까지'아랍: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혁명까지2016.05.10
유진 로건 지음|이은정 옮김|까치|784쪽|3만원

아랍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읽어 내려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랍은 하나이면서도 여럿이다. 
아프리카 북단과 아라비아반도에 이르기까지 두 대륙에 걸친 광대한 지역의 
다양한 아랍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순간 길을 잃는다. 
아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언하기도 어렵다. 
두 이슬람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품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나, 나일 문명의 후예 이집트, 
아니면 지금의 이라크·시리아· 레바논으로 이어지는 메소포타미아의 후예들이 
다 스스로를 아랍의 주류라 말한다. 
하지만 어쩌면 제국의 변방, 묵묵히 사막과 광야를 살아가는 유목민들이 아랍의 전형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의 언어를 가졌음에도 이들은 각자 사뭇 다른 삶을 살아왔다.

유진 로건의 '아랍: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혁명까지'는 다양하게 얽힌 아랍의 역사를 찬찬히 풀어 설명한 저작이다. 
16세기 맘루크조(朝)의 종말부터 최근 아랍의 봄 직후까지의 이야기다. 
물경 500년의 긴 역사를 오롯이 아랍에 초점을 두어 기술하고 있다. 명확한 주제만큼이나 글도 선명하다. 
제목은 일견 딱딱해 보이지만 유려한 본문은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복잡한 인물과 사건들을 제대로 따라가기 어려워 때론 앞으로 돌아가 되짚어내는 품을 들일 필요가 없다. 
정확한 맥락을 구술하듯 풀어낸 덕이다. 읽는 이는 그저 흐름을 타면 된다.

이 책은 입증된 사실에 기초한 정사(正史)다. 하지만 야사(野史) 같은 흥미로움도 함께 담아냈다. 
다양한 회고록, 아랍 매체 기사와 인터뷰, 그리고 저자의 현장 경험에서 우러난 뒷이야기가 풍성하다. 
팔레스타인의 비극, 나세르와 사다트의 고민, 카다피의 등장과 변신, 그리고 오사마 빈라덴을 설득시켜 알카에다로 
이끌었던 셰이크 무함마드 알 아잠의 존재 등의 기록은 보물 같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랍 역사상 손꼽히는 비극인 레바논 사브라-샤틸라 난민촌 학살사건의 전말도 
세세하게 담겨 있다. 쉽게 읽히지만 내용은 풍성하며 결코 가볍지 않다.

1920년대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최신 항공기와 대포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군도 모로코 기병들에게는 무력하다. 무적의 압드 엘 크림 알 카타비가 
이끄는 이슬람 기병의 깃발에는“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고 적혀 있다. 
1920년대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까치 제공
옥스퍼드에 몸담고 있는 저자는 지난 세기 영국의 아랍 정책을 조소한다. 어쩌면 지금 벌어지는 중동의 혼란은 영국의 
이기주의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스스로도 제국의 지위를 잃어갔다고 설파한다.

"영국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자신들의 제국에 아랍 세계를 통합시키려는 목적으로 중동에 발을 내딛었다. (중략) 
아랍 세계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났을 때, 중동의 대영제국은 자산이 아니라 부채가 되어 있었다." 
건조한 연대기적 중동 역사와는 달리 저자는 아랍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이 시선이야말로 이 책 최고의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다. 영미권 작가로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했다는 찬사와 함께, 
아랍에 경도된 편협한 기술이라는 비판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유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저자가 정작 전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는 행간에 숨어 있다. 19세기 아랍판 문예부흥, '나흐다(Nahda)'에 대한 향수다. 
중세적 아랍 문화의 관성을 떨쳐버리고 세속주의와 실용주의에 기반하여 현대로 도약하기를 꿈꾸었던 사조(思潮)다
열강의 개입만 없었더라면 '나흐다'는 서구의 르네상스와 나란히 시대를 갈음하는 변혁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곳곳에 배어 있다.

중동은 여전히 분열과 갈등, 중세적 질서가 가득 찬 곳으로 비치고 있다. 
테러가 만연하고, 종파 갈등은 심화되고 있다. 그나마 안정적이었던 산유국들도 저유가로 인해 흔들거리는 즈음이다. 
이 혼돈의 시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아랍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랍에 대한 기대를 접고 이슬람의 이름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에게 여전히 아랍에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저자는 아랍의 봄을 지켜보며 애써 희망을 담아 글을 맺는다. 
"혁명의 첫해가 지나고 나면 아랍인들은 안에서는 새로운 자유를, 그리고 밖으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21세기를 
구체화할 수 있는 더 큰 경험을 열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아랍은 어떤 의미일까? 
석유, 사막, 낙타 그리고 테러 등이 단편적으로 이어진 이미지의 집합 아니었을까? 
길고 깊은 경제 관계를 유지해 왔음에도 실체는 잘 몰랐던 지구 저편의 아랍 세계, 그 속살과 고민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책장을 넘기며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의 눈에는 아랍과 중동을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이 비친다. 
제2의 중동 붐이 시장과 석유만 겨냥한 것이라면 자못 아쉽다. 
역사의 이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중동정치학)덧. 778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굳이 끝까지 다 읽으려 할 필요는 없다. 
관심 있는 장(章)을 먼저 떼어서 읽어도 완결된 작은 단행본을 읽은 느낌이다. 
중동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6장부터 읽는 것도 좋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중동정치학)


저자 : 유진 로건
저자 유진 로건(EUGENE ROGAN)은 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중동 역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유진 로건은 현재 옥스퍼드 대학교에서중동 근대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세인트 앤터니스 대학의 중동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다. 

전작 『오스만 제국 말기의 국경(FRONTIERS OF THE STATE IN THE LATE OTTOMAN EMPIRE)』은 앨버트 후라니 상을 

받았다. 그의 신작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몰락 : 중동 대전 1914-1920(THE FALL OF THE OTTOMANS : THE GREAT 

WAR IN THE MIDDLE EAST, 1914-1920)』이 있다. 그는 현재 옥스퍼드에서 살고 있다.


역자 : 이은정

역자 이은정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어과와 터키 국립 앙카라 대학교 역사학과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쳤으며,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오스만 황실 하렘과 여성”이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오스만 제국 및 이슬람 여성 관련 글들을 쓰고 있다. 

“16-17세기 오스만 황실 여성의 사회적 위상과 공적 역할 ─오스만 황태후의 역할을 중심으로”(여성과 역사, 2012)와 

“‘다종교·다민족·다문화’적인 오스만 제국의 통치전략”(역사학보, 2013) 등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