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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발설지옥'에 빠지지 않기

바람아님 2016. 6. 15. 06:50

(출처-조선일보 2016.06.15  탁현규 간송미술관 연구원)


탁현규 간송미술관 연구원그 많던 화장실 낙서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인터넷이 생기면서 모두 그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낙서는 하루에 수십 명이 읽지만 인터넷 글은 수천 명이 읽으니 그 전파력은 비교가 안 된다. 
화장실 낙서는 비슷한 생활공간을 가지는 사람만 접하지만 인터넷 글은 지구 반대편 사람까지도 
곧장 끌어들이니 발 없는 말이 수만 킬로미터를 간다.

절에 가면 명부전(冥府殿)이란 건물이 있고 여기에는 사후 세계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열 명의 왕을 그린 
시왕탱이 있다. 재미있는 건 폭마다 펼쳐지는 지옥 장면인데 그 가운데 발설(拔舌)지옥이란 곳이 있다. 
죄인의 입에서 혀를 길게 뽑아 놓고 그 위에서 소가 쟁기를 끈다. 
살아서 입으로 지은 죄가 많은 이가 이 벌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지옥의 모습 가운데 업경대(業鏡臺)가 있다. 생전의 죄짓는 모습이 고스란히 구슬에 비쳐 숨길 수 없으니 
지금 식으로 말하면 CCTV나 블랙박스라고 해야겠다. 우리 시대의 업경대에는 동영상뿐만 아니라 말도 고스란히 저장된다. 
인터넷상의 많은 SNS에 남긴 말 또한 영원토록 살아남는다.

각종 미디어가 넘치는 오늘날에 말도 넘쳐 나서 하나 마나 한 말, 하지 않아도 될 말,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인터넷을 
가득 메웠다. 말도 화폐처럼 가치가 낮은 것이 높은 것을 몰아낸다. 선플보다 악플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사일언] '발설지옥'에 빠지지 않기
따라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말을 삼가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정치인들의 말은 모든 사람이 귀 기울이며 한 단어도 놓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신실(信實)해야 한다. 
처칠 같은 유머나 링컨 같은 명연설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거리의 상말을 우리 손으로 뽑은 정치인들 입에서 듣는 곤혹스러움만 면해도 다행이겠다.

율곡 이이 선생이 쓴, 해서는 안 되는 말만 마음에 새겨도 우리는 다 같이 발설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희롱하는 말로 남을 농락하며 침해하고 모욕하며 헛소문을 망령되게 전하여 여러 사람을 현혹게 하며 
서로 만나면 옳다 하고 돌아서면 그르다 하며 남의 비밀을 들춰내며 허물을 말하기 좋아하는 것을 삼가라."




게시자 추가 이미지 - 발설지옥(拔舌地獄)

(양산 신흥사 명부전의 시왕탱 중 발설지옥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