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분수대] 맥주 민주주의

바람아님 2016. 8. 16. 23:59
중앙일보 2016.08.15. 18:29

음료 중 물·차 다음으로 소비량이 많다는 맥주. 무척 대중적이기 때문인지 민주주의와 관계 깊은 술이다. 대개 전체 술 소비 중 맥주 비중이 높은 나라일수록 민주화 수준이 높다고 한다. 위스키·포도주 등보다 싼 맥주 소비가 많다는 건 서민들도 술자리를 즐긴다는 얘기다. 이럴수록 경제적 평등과 함께 정치적 자유가 허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뿐만 아니라 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도입되면 다른 술보다 맥주 소비가 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맥주는 다른 독주와 달리 오래 마셔도 대취하지 않는다. 토론문화가 뿌리내릴수록 찾게 된다는 뜻이다.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실제로 북한과 닮았던 루마니아에선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몰락 후 맥주 소비량이 30% 이상 늘었다. 또 맥주가 확산되면 진지한 논의가 활성화될 공산이 크다. 해외 언론에서 말하는 ‘맥주 민주주의’다.

각국의 대표 맥주에는 대개 정치적 사연이 녹아 있다. 미국에서 수위를 다투는 버드와이저와 밀러 모두 중부인 세인트루이스와 밀워키에서 출발했다. 이는 미국 이민사와 관련돼 있는 것으로 맥주 기술이 뛰어난 독일계 이민자들이 고향과 환경이 비슷한 이 지역에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중국 산둥반도의 휴양도시 칭다오(靑島)가 세계적인 칭다오 맥주의 고향이 된 것도 역사 때문이다. 제국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말 산둥반도를 빼앗은 나라가 독일이었다. 마침 이곳에서 양질의 지하수가 발견돼 독일인들은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독일 양조기술 덕에 칭다오 맥주는 1906년 세계 맥주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다.


1876년 일본 최초로 생산된 삿포로 맥주는 메이지 유신의 산물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북방에 위치한 홋카이도 개척의 필요성을 절감해 개발위원회를 세운다. 위원회는 척박한 홋카이도에서 호프가 잘 자란다는 걸 알고는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삿포로 맥주에 홋카이도 개발위원회의 상징인 북극성이 그려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맥주가 요즘 북한에서도 인기라고 한다. 지난 12일부터 평양 강변에서 ‘대동강맥주축전’이 열리고 있다. 국제적 제재에도 불구하고 맥주를 마시며 행복하게 지내는 주민들의 모습을 과시해 김정은 체제의 건재함을 알리겠다는 속셈이다. 하지만 이는 오판 중 오판이다. 토론에 딱 맞는 맥주가 보급될수록 체제 모순에 대한 논의를 할 기회가 많아질 것이다. 북한에서도 맥주 민주주의가 작동해 미약하나마 체제 변화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