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배가 출항했어요. 목적지는 일본인 거 같은데 불행히도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어요. 한참 후에 엄청난 양의 유물들이 발견됐습니다. 누구 속이 제일 쓰릴까요?”
'찰 진' 전라도 말씨의 최선주 박사(중앙국립박물관 아시아부장,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전시 담당)가 대뜸 물었을 때 오히려 반문했다. “가만, 그 유물들 주인은 누구죠?” “하하, 물론 우리 거죠. 우리 영해에서 발견됐으니. 속지주의 원칙입니다.” “흠, 그렇다면 중국!” “일본 아닐까요?” “왜죠?” “안타깝게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빼고 보면, 중국 측은 이미 돈을 받았고, 일본 측은 돈을 주고도 물건을 못 받았으니까요.”

근거는 ‘목간’이다. 목간은 지금의 택배 운송장이다. 즉, 나무 꼬리표에는 물건이 도착할 곳, 수령인의 이름과 물건 내용이 적혀있다.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침몰선에서는 300여 점의 목간이 발견됐다. 주소지 모두 다 일본이다. 고려 사람의 이름이나 고려와 관련된 사찰, 기관의 목간은 나오지 않았다. 40년 동안 바다에 있었으니 더 유실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당시 고려에 들려 물건을 내려놓고 가는 게 목적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40년 전인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처음 발견돼 이듬해부터 10년간 해상발굴을 통해 발견된 침몰선은 이렇게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무역선이었다.
함께 발견된, 즉 배에 실렸던 물품은 도자기와 금속품 재질의 다양한 용도의 그릇(큰 볼부터 대접, 주전자, 작은 접시, 찻잔, 잔 받침 등), 항아리, 화병, 연적, 장신구 등 무려 2만 점이 넘었다.

도대체 일본에서 중국 화폐가 왜 필요했을까. “지금으로 치면 외환거래법 위반 아닌가요?” (웃음) 발견된 엽전은 800만 개, 무게만 28톤이다. 동전이 그대로 유통됐을 가능성과 녹여서 불상 등을 만드는 데 사용했을 가능성 모두 있다.
고급 불상이나 가구에 사용되는 ‘자단목’이 ‘멀쩡하게’ 발견된 것도 놀랍고, 후추와 계피와 같은 향신료나 약재, 배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숯 역시 신기할 정도로 그대로다. ‘갯벌’에 박혀 그대로 보존돼 부식이 덜 됐다 하지만 보존 상태가 대단하다. 650년을 넘어 현대 대한민국 앞바다로 온 ‘신안해저선’은 그야말로 보물선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발굴 40주년을 기념해 전시를 준비했다. 기념 전시가 더욱 뜻깊어진 이유는 박물관 최초로 ‘수장고를 탈탈 털었기’ 때문이다. 올 3월 새로 부임한 이영훈 관장이 “이왕지사 할 거 제대도 해보자”며 보여줄 수 있는 유물을 다 꺼내자고 한 것. 그간 신안해저선 관련 전시는 있었지만 500~1천 점 정도의 유물을 보여주는 수준이었다. 전시 4개월을 앞두고 1천 점 정도로 구상한 전시품목을 2만 개로 늘리다니. 학예사들은 당황했지만 2만 점의 유물을 하나씩 추리기 시작했다.
전시를 보는 내내 탄성이 그치질 않았다. 650년 전 물건이 그렇게 멀쩡하다는 것도 신기거니와 그릇 도매 시장에 온 듯 물건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은 다양한 유물이지만, 전시는 그저 오래된 유물을 보여주는 도자기, 금속공예전의 의미 이상이다. 2만 점을 한꺼번에 만나게 되니 한편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구성됐다.
12~13세기 중국 송나라 시대의 동아시아 무역, 문화의 전파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저절로 상상하게 된다. 오랜 바다의 여정,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나무 상자의 뚜껑에 그리고 놀았을 장기판이며 바둑돌. 부러졌지만 반 이상 멀쩡하게 남은 도마와 칼 그리고 나라의 특색을 담은 수저 등은 선상의 생활과 탑승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짐작하게 한다.

신안해저선 발굴은 우리나라 해양유물 (수중) 발굴의 시초였다. 바닷속 유물을 발굴한 경험이 없는 터라 당시 유물을 수습한 이들은 해군(잠수요원)이었다. 그리고 젊은 학예연구원들이 그 유물의 정체를 파악하고, 이름을 붙이고, 얽힌 이야기를 꿰맞춰 나갔다. 그들은 문화재를 관리하고 탐구하는 수장 자리에 올라있거나, 작고했다. 40년이 흘렀으니 생존한 이들의 나이는 80 전후다.
“동아시아 문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교류되고, 공통분모가 있었던 거죠. 만일 배가 침몰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면, 일본 사회에 대단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습니까. 이거 보세요. 이 보물선은 매우 슬픈 이야기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흘러올 것을 예상한 것처럼. 나머지 하나도 분명 있을 거예요.”

최 박사가 가리킨 건 마지막 전시관 출구 쪽에 세워진 백자 접시다. 분홍 나뭇잎 두 장이 그려져 있는 흰 접시에는 한시가 적혀있다. 당나라 때 궁녀가 지은 시라고 한다.
“흐르는 물은 어찌 저리도 급한고/ 깊은 궁궐은 종일토록 한가한데”.학자들은 시 후반부가 적힌 접시가 배에 함께 실렸을 가능성을 높게 본다. 그 시 후반부는 이렇다.“은근한 마음 붉은 잎에 시어 보내니/ 인간 세상으로 쉬이 흘러가기를”
조금 천박할지 모르지만, 이번 전시에 공개된 유물 2만 점을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1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800만 개 동전은 빼고) 단 5천 원의 입장료를 내고 1조 원 어치 유물을, 그것도 650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지 않을 이유는 없다. 눈치 빠른 국민 5만 명이 찾았다고 한다. 서울 전시는 9월 4일까지니 서둘러야 한다. 이후엔 10월 25일부터 2017년 1월 30일까지 일정으로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전시가 이어진다.

신혜선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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