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6-10-15 03:00:00
◇사행의 국제정치/하영선 등 지음/420쪽·1만7000원/아연출판부
#1. 중국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건륭제는 칠순에 이르러 황금으로 치장한 건물 ‘찰십륜포(札什倫布)’를 열하에 짓는다. 이 화려한 건물의 주인은 황제가 아니었다. 티베트 라마교의 2인자인 판첸라마의 거처였다. 판첸라마는 1780년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연 때 가마를 탄 채 황제의 침전(寢殿)까지 들어간 유일한 외국인이다. 판첸라마는 조선을 비롯한 조공사절과 달리 황제에게 절하지 않았고, 그와 옷깃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곳에 나란히 앉았다고 한다. 청나라가 외국에 베푼 가장 파격적인 예우였다.
#2. 지난해 9월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중국 전승절 기념식. 30여 개국 정상 중 유일하게 배석자 없이 정상끼리 나란히 만나는 ‘특별 오찬’이 마련됐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조차 초대받지 못한 오찬이었다. 톈안먼 망루에서 열병식을 참관할 땐 시진핑 주석, 푸틴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미국의 불참 압력에도 방중을 결단한 박 대통령에게 중국이 특별 예우로 화답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두 사건은 200여 년의 시차를 보이고 있지만 곱씹을 만큼 닮은 점이 있다.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부상한 현재의 중국과 조공 질서의 정점에 있던 청나라가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한국과 티베트에 파격적인 환대를 행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것이 냉엄한 국제정치에서 고도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박 대통령에 대한 환대가 G2로 부상한 중국의 미국 견제와 맞닿아 있다면, 18세기 청나라의 그것도 서쪽 변방의 안보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1780년 축하연에 외교 사절로 파견된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황제는 법사(판첸라마)를 모셔 티베트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함으로써 이들의 세력을 분산시켰다. 이것이 청나라가 주변 나라를 제어하는 책략”이라고 썼다. 변방의 강력한 세력이던 몽골과 차별 대우를 함으로써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효과를 노렸다는 얘기다.
이 책은 조선 사신들이 남긴 사행록(使行錄·외교 활동 기록)을 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독특한 시도를 하고 있다. 주로 유럽과 미국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기존 외교사 서적들과 비교하면 신선한 내용이다. 특히 동아시아사를 다룰 때 중국을 중심부로 놓고 조선, 일본, 몽골, 티베트 등을 주변부로 놓는 데 반해 이 책은 조선의 관점에서 중국과 주변국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건륭제 축하연과 관련해 황제가 조선 사신들에게 판첸라마 접견을 강요한 사건을 다룬 내용이 특히 인상적이다. 주자성리학을 신봉한 조선 사신에게 티베트 불교의 승려를 찾아가 절하라는 황제의 요구는 지금으로 치면 거센 외교적 도전이었다. 고뇌를 거듭한 사신들은 황제의 계속된 압박에 마지못해 판첸라마를 찾아가지만, 끝내 절을 올리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 격인 청나라의 예부(禮部)가 황제에게 “조선 사신들이 절을 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려 조선 측과 논란을 벌이기도 한다.
국제정치학 분야의 석학인 저자(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는 “건륭제는 티베트를 적극적으로 회유하기 위해 조선 사신에게 예방을 명한 것”이라며 “조선과 티베트 사신의 만남은 18세기 청대 복합 천하질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장면”이라고 썼다.
김상운 기자
중국으로 향하는 조선 사신들의 모습을 담은 ‘연행도’(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아연출판부 제공
#2. 지난해 9월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중국 전승절 기념식. 30여 개국 정상 중 유일하게 배석자 없이 정상끼리 나란히 만나는 ‘특별 오찬’이 마련됐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조차 초대받지 못한 오찬이었다. 톈안먼 망루에서 열병식을 참관할 땐 시진핑 주석, 푸틴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미국의 불참 압력에도 방중을 결단한 박 대통령에게 중국이 특별 예우로 화답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두 사건은 200여 년의 시차를 보이고 있지만 곱씹을 만큼 닮은 점이 있다.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부상한 현재의 중국과 조공 질서의 정점에 있던 청나라가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한국과 티베트에 파격적인 환대를 행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것이 냉엄한 국제정치에서 고도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박 대통령에 대한 환대가 G2로 부상한 중국의 미국 견제와 맞닿아 있다면, 18세기 청나라의 그것도 서쪽 변방의 안보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1780년 축하연에 외교 사절로 파견된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황제는 법사(판첸라마)를 모셔 티베트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함으로써 이들의 세력을 분산시켰다. 이것이 청나라가 주변 나라를 제어하는 책략”이라고 썼다. 변방의 강력한 세력이던 몽골과 차별 대우를 함으로써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효과를 노렸다는 얘기다.
이 책은 조선 사신들이 남긴 사행록(使行錄·외교 활동 기록)을 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독특한 시도를 하고 있다. 주로 유럽과 미국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기존 외교사 서적들과 비교하면 신선한 내용이다. 특히 동아시아사를 다룰 때 중국을 중심부로 놓고 조선, 일본, 몽골, 티베트 등을 주변부로 놓는 데 반해 이 책은 조선의 관점에서 중국과 주변국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건륭제 축하연과 관련해 황제가 조선 사신들에게 판첸라마 접견을 강요한 사건을 다룬 내용이 특히 인상적이다. 주자성리학을 신봉한 조선 사신에게 티베트 불교의 승려를 찾아가 절하라는 황제의 요구는 지금으로 치면 거센 외교적 도전이었다. 고뇌를 거듭한 사신들은 황제의 계속된 압박에 마지못해 판첸라마를 찾아가지만, 끝내 절을 올리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 격인 청나라의 예부(禮部)가 황제에게 “조선 사신들이 절을 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려 조선 측과 논란을 벌이기도 한다.
국제정치학 분야의 석학인 저자(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는 “건륭제는 티베트를 적극적으로 회유하기 위해 조선 사신에게 예방을 명한 것”이라며 “조선과 티베트 사신의 만남은 18세기 청대 복합 천하질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장면”이라고 썼다.
김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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