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6-10-15 03:00:00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정유재란은 왜적이 부산 다대포에 상륙한 1597년 1월 14일부터 1598년 11월 26일까지 이어졌다. 본격적인 전투는 1597년 7월 16일 칠천량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참패한 이후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해전사(海戰史)에 남는 기록적 대승을 거둔 명량해전과 장군이 왜적의 흉탄에 숨을 거둔 노량해전까지의 1년 4개월여다.
4년 전 임진왜란 때는 무기력한 관군을 대신해 호남 의병장 고경명과 호서 의병장 조헌 등이 이끈 의병들의 살신성인으로 왜적의 호남 침공을 간신히 막아냈다. 왜적은 정유재란 때는 보복하듯 전라도를 집중 공략했다. 조선 수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한 전라도를 쳐야 조선 수군을 바다 위에 떠다니게 만들 수 있고 조선의 남부 4도까지 탈취할 수 있다는 전략에 따른 것이다.
한국외교협회(회장 정태익)와 한국대학총장협회(이사장 이대순)는 13일부터 1박 2일간 정유재란 전적지(戰跡地)를 탐방했다. 정유재란 막바지에 왜적은 울산과 사천에 성을 세웠다. 순천만에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교성을 쌓아 요새화했다. 조명(朝明) 연합 육·해군은 1598년 9월 20일을 기해 육지와 바다에서 3성(城)을 일제히 공격하는 사로병진(四路竝進) 작전을 펼쳤다. 왜교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여서 육지와 광양만 해상에서 양국이 왜적을 협공했다.
왜교성 전투는 임진왜란 7년 전쟁 기간 중 동북아 3국이 맞붙은 유일한 국제 전투이다. 7년 전쟁을 마감하는 사실상 최후의 전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전몰(戰歿)한 노량해전만 강조되는 바람에 왜교성 아래 광양만 해상에서 입체적인 작전을 펼친 조명 연합군의 활약상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어제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을 비롯한 전직 대사들과 대학 총장들은 검단산성과 이순신대교, 노량의 충렬사, 남해의 관음포까지 4개 시군, 95km를 달리며 정유재란을 되새기는 강행군을 했다. 전남 순천시 해룡면 출신인 김병연 전 주(駐)노르웨이 대사는 ‘정유재란 역사연구회’(임동규 회장)를 통해 한중일 3국의 격전지를 정유재란 역사공원이나 동북아 평화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공론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재상 율곡 이이는 임란을 예상한 것처럼 생전에 선조에게 두 차례 ‘돌직구 상소’를 했다. 상소에서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라며 조선의 피폐한 재정과 군역의 문란함을 통탄했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려 당파 싸움으로 영일이 없던 선조 때의 조정과 나라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처했는데도 진흙탕 싸움이나 벌이는 작금의 여야 정치권 간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혀를 찰 수밖에 없다.
고위 외교관과 대학 총장을 역임한 저명인사들은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차까지 흔들리는 작금의 상황을 위기라며 한목소리로 탄식과 우려를 표했다. 지금 대한민국 정부와 정치권의 리더십이 무기력 무능 무책임으로 일관했던 임란 때 조선 조정의 리더십과 다르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는가. 아널드 토인비가 갈파했듯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 밝은 미래는 결코 오지 않는다.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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