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촛불과 횃불

바람아님 2016. 12. 5. 08:40

(조선일보 2016.12.05 선우정 논설위원)


영국 노동당이 횃불 로고를 사용한 건 1918년이다. 삽과 펜 가운데 횃불을 세웠다. 이 로고를 62년 동안 썼다. 
노동당이 로고를 바꾼 건 대처의 보수당에 정권을 넘기고 급진 색깔을 빼는 데 열중할 때였다. 
영국의 국화인 장미로 바꿨다. 
이때 "얼씨구나" 하면서 횃불을 주워 보수당 상징으로 바꾼 게 대처 총리다. 
그 후 '자유의 횃불'이란 표현을 주 무기로 공산주의를 공격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우리가 밝힌 횃불이 철의 장막 너머로 자유의 빛을 밝혔다"고 했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횃불은 생명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횃불 두 개를 거꾸로 가로지르면 죽음을 상징했다. 근대 시민혁명 때 횃불은 자유를 뜻했다. 
미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정식 명칭은 '세계를 비추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다. 
오른손에 든 횃불에 이름의 뜻이 다 담겨 있다. 횃불엔 고정된 이념이 없다. 
세상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시대적 진보 정신과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만물상] 촛불과 횃불

▶횃불은 '밝힌다'는 뜻과 함께 '태운다'는 뜻도 있다. 
진리를 밝히고 거짓을 태우는 횃불, 새 시대를 밝히고 구시대를 태우는 횃불은 전환기의 상징이다. 
역사 속의 횃불은 반대로 나와 다른 타인을 부정하는 차별과 폭력의 상징으로 전락할 때도 있었다. 
KKK단의 횃불, 나치 독일과 북한 세습 정권의 섬뜩한 횃불 행진은 생명과 자유를 태워 세상을 훨씬 더 어둡게 했다.

▶지난 주말 최순실 사건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 때 횃불이 나왔다. 416개가 행진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4월 16일을 뜻한다고 하니 생명과 진실을 상징하는 듯했다.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는 여당 의원의 발언에 대한 항의와 조롱의 의미도 담겨 있다. 
커져만 가는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기도 하다. 
동시에 횃불이 그동안 평화롭게 이어져 온 촛불 시위를 바꿀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가짜 보수를 횃불로 태워버리자"고 했던 어느 야당 인사는 이날 광장에서 "촛불을 횃불로, 횃불을 들불로"라고 했다. 

▶미 외교 전문지가 한국의 대규모 촛불 집회를 '김치만큼 한국적'이라고 평했다. 
한국인의 독특한 음식 문화인 김치처럼 촛불 집회는 한국만의 특별한 현상이라는 뜻이다. 
외신은 그동안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비판하면서도 폭력으로 흐르지 않는 시위 문화만큼은 높이 평가해 왔다. 
하나하나는 작지만 모이면 거대한 촛불의 힘이다. 
이제 등장한 횃불이 진리를 밝히는 횃불이 아니라 자유를 태우는 횃불이 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