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1504∼1551).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1536∼1584)의 어머니이자 초충도(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에 뛰어났던 화가다.
전통적 현모양처의 상징인 신사임당은 2007년 여성 최초로 화폐 인물에 선정, 2009년부터 5만원권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신사임당이 선정되는 것에 대해 여성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신사임당이 문제가 있는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그동안 그가 한국사회에서 소비되어 왔던 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신사임당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우리나라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지만 막상 그 삶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신사임당을 조명한 책 2권이 잇따라 나왔다. 서울대 국사학과 첫 여성교수였던 정옥자 명예교수가 신사임당의 일생을 다룬 ‘사임당전’과 미술사학자인 고연희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 등 전문가 5명이 신사임당의 이미지 변천사를 추적한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이다.
평전과 팩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사임당전’은 아들 율곡이 남긴 ‘선비행장’ 등 다양한 문헌을 통해 사임당의 생애를 복원했다. 저명한 사림파 선비 신명화의 둘째딸 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학문과 예술을 접했다. 하지만 19세에 한량인 이원수와 결혼하면서 고단한 삶이 시작됐다.
사임당은 결혼 이후 자수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는데, 그림은 자수를 위한 수본이 됐다. 예술활동이 돈을 버는 방편이자 고단했던 삶의 위안이 된 셈이다.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그림 대부분이 초충도인 것은 당시 규중의 여인들이 선호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의 4남3녀 가운데 율곡에 가려졌지만 나머지 자식들도 학식과 예술적 재능을 갖췄다. 특히 큰딸 이매창과 막내아들 이우는 시·서·화에 뛰어났다. ‘작은 사임당’으로 불린 이매창은 율곡의 서얼 허통 정책(양반 첩의 자식인 서얼에게 관직을 고루 주자는 정책)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등 경륜까지 갖췄다. 저자 정 교수는 결론적으로 사임당에 대해 가정과 자기실현을 동시에 해낸 조선시대 ‘워킹맘’으로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에 비해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은 신사임당의 모습을 입체적이고 냉정하게 분석한다. 신사임당이 추앙받게 된 데는 율곡이 조선후기 서인의 중추로 자리매김하면서 부터다. 생전의 율곡은 중도적 인물이었지만 수제자인 김장생과 그가 길러낸 송시열 김집 최명길 등 서인들은 율곡을 기리면서 그 어머니인 사임당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
특히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뿌리내리게 만든 장본인 송시열(1607∼1689)은 율곡을 키워낸 어머니로서 사임당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이를 위해 16세기에 높이 평가받던 사임당의 산수화를 무시하고 초충도를 높이 평가했다. 사실 사임당은 여러 사대부가 찬사를 남길 만큼 뛰어난 산수화가였다.
하지만 송시열에게 사임당의 산수화는 너무 전문적인데다 스님까지 등장한다는 점에서 성리학자 율곡의 어머니에 맞지 않았다. 당시 송시열이 사임당의 산수화를 위작으로 선포한 이후 그의 산수화는 역사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대신 미물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베푼 어머니에게 어울리는 초충도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임당의 초충도는 모두 사임당이 그려졌다고 전해지는 전칭작일 뿐 진작은 없다.
20세기 전반 일제시대에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이름으로 다시 주목받았다.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는 일본에서 유입된 것으로 조선인 징병을 독려하기 위해 신사임당에게 군국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덧씌웠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대에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국가영웅화 작업 속에서 다시 등장한 신사임당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으로 자리매김한다. 영부인 육영수는 근대화된 현모양처 신사임당의 현신으로 비유됐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신사임당의 신화는 500여년을 이어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5만원권 주인공 논란은 사임당의 이미지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내년 1월엔 배우 이영애 주연의 드라마 ‘사임당-빛의 일기’가 방영될 예정이라 다시 한 번 신사임당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신사임당의 이미지가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주목된다.
장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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