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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벽돌책] 다음 세대 독자도 '다빈치 코드'를 읽을까

바람아님 2016. 12. 25. 10:19

(조선일보 2016.12.24 장강명 소설가)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장강명 소설가

보통 출판사가 외서를 번역·출간할 때 저작권자와 계약 기간은 5년으로 잡는다. 

그 5년 사이에 책을 내지 못해도 한국 출판사는 계약금을 돌려받을 수 없다. 

번역과 편집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벽돌책'들은 간혹 이런 사고가 발생하는데, 

그러면 출판사는 고민이 깊어진다. 계약을 갱신할 것인가?


뭐, 책이 좋다면야.


그런데 같은 사고가 한 번 더 벌어지면? 

그러니까, 처음 계약 시점으로부터 10년이 지났는데도 책이 나오지 않은 경우라면? 

번역서가 계약을 두 번이나 갱신하고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그런 예외적 사례다.


정확한 번역을 위해 정비소에서 실제로 모터사이클을 분해해가며 기술 용어를 배운 장경렬 서울대 영문과 교수의 정성도 

기가 막히고(그는 "이 책을 사볼 여력이 안 되면 훔쳐서라도 읽어라"고 한다), 그걸 기다려준 문학과지성사도 대단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책 자체가 '나는 10년쯤 지나도 여전히 위력적일 걸' 하고 믿음을 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10년, 20년 뒤에 '다빈치 코드'를 읽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수천만명의 지갑을 여는 데에는 성공한 책이지만, 한 세대 이상을 버티지는 못할 거다. 

책이 시간을 이기려면 세대마다 지식인 수백명가량을 새로 사로잡아 그들의 영혼을 불태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고전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그런 책이라고 생각한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M.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0/ 799 p./ 1만8000원

843-ㅍ88ㅅ/ [정독]어문학족보실(2동1층)/ [강서]3층 자료실서고(직원문의)


피어시그가 주창한 '질(質)의 철학'이 심오한 진리인지 그저 궤변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모터사이클에 올라 칸트를 비웃고, 인도 철학에 작별을 고하고, 

노자를 재해석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무너뜨리는 800쪽의 여정을 마치고 난 사람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의 폭은 매우 좁다. 동의든 거부든 응답은 격렬하리라. 

그래서 출간 40년이 지난 지금도 해외 인터넷에서는 재야 철학자들이 사이트를 만들어 

이 책을 토론 중이다. 

완독하는 사람 수가 적다고 시간을 상대하는 이 책의 힘도 작은 것은 아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 책의 내용을 요약 소개하는 것은 이 책이 주장하는 바에 어긋난다. 

피어시그에 따르면 주체(독자)와 객체(책)는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이원론에서 현대 문명의 비극들이 시작된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현실은 주체와 객체가 만나는 사건(독서)뿐이며, 이걸 다시 풀면 그냥 '직접 읽어보시라'는 말이 된다. 

사볼 여력이 안 되면 훔쳐서 읽지는 마시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