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2016-11-30 17:36:52
불면야정천하전(不眠夜靜天河轉)
잠 못드는 조용한 밤 은하수만 구를 뿐
독보중정파국화(獨步中庭把菊花)
홀로 뜰을 거닐며 국화 한 송이 쥐어보네
잠 못드는 조용한 밤 은하수만 구를 뿐
독보중정파국화(獨步中庭把菊花)
홀로 뜰을 거닐며 국화 한 송이 쥐어보네
막부(幕府)의 후원 아래 지어진 세이잔지는 외교사절을 위한 영빈관을 겸했다. 창건주는 겐소(玄蘇, 1537~1611)화상이다. 사명이 귀국한 지 2년 후 보낸 편지에는 “귀도(貴島 쓰시마)에 갔을 때 노형(老兄 겐소) 등과 같이 일본으로 건너가서…”라고 했다. 함께 본섬까지 안내 및 동행한 인연을 고맙게 여겨 사신(使臣) 편에 선물과 함께 안부를 전한 것이다.
사명과 겐소의 만남은 ‘국화와 칼’(1946년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학 입문서로 펴낸 책 제목. 국화는 미학적 안목, 칼은 무력 숭상을 상징한다)이었다. 머리카락마저 희끗희끗한 사명당은 뱃멀미 끝에 겨우 객관(客館)에 도착했다. 왼쪽 두 번째 어금니 통증 때문에 베개에 엎드려 신음할 정도로 후유증을 남긴 고단한 일정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쓰시마까지 온 것은 조정의 ‘칼’ 같은 명령 때문이다. 겐소 역시 조선어에 능통하고 외교문서를 다룰 만큼 뛰어난 문장가라는 이유로 막부의 ‘칼’에 의해 본섬에서 차출돼 쓰시마로 왔다.
겐소는 숙소 정원을 가꾸면서 섬세한 미학적 세계를 구축했다. 가을 뜨락에 어울리는 국화 다루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사명은 “누런 국화, 초록 감귤도 모두 무료하다(黃菊綠橘總無賴)”는 일성을 날린다. 만개한 국화와 보기 드문 감귤도 불편한 심신 때문에 심드렁한 까닭이다. 이후 서서히 본연의 감수성이 되살아나며 서리 맞은 황국(黃菊)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국화 한 송이를 손에 쥐는’ 미학적 음미를 통해 겐소의 국화에 화답한 것이다. ‘칼’로 인해 서로 적으로 만났지만 ‘국화’ 때문에 우정으로 승화됐다고나 할까.
원철 <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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