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6.12.26 01:21
다나카는 93년 사망했지만 2016년 오늘의 일본 정계에도 ‘어둠의 쇼군’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연초에 불기 시작한 ‘(다나카) 가쿠에이 열풍’이 연말이 되도록 그칠 줄 모르고 일본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도쿄도지사가 다나카의 생애를 1인칭 시점으로 그려 낸 소설 『천재』가 지난 1월 출간돼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올 한 해 다나카 관련 서적만 30여 편이 쏟아졌다. 『천재』는 1년간 100만 권 가까이 팔리며 올해 일본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전문가들은 다나카가 재조명받는 이유를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대규모 개발사업으로 민생을 도모한 추진력에 있다고 말한다. 이는 현재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에 일본인들이 염증을 느끼는 것과 대조된다. 아베 총리는 국민 절반 가까이가 반대하는 개헌을 “필생의 과업”이라며 최우선과제로 삼고 있다. 평론가 사타카 마코토(佐高信)는 “다나카의 자민당은 민생을 우선시했지만 아베의 자민당은 민생보다 이념을 앞세우고 있다. 그런 아베 정권에 대한 반발로 다나카가 재조명받고 있는 것”이라고 평했다. 다나카를 전담 취재했던 하야노 도루(早野透)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다나카는 민중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봤다. 그는 전후 일본 헌법이 미국 주도로 제정됐다는 걸 불만스러워했지만 민생 개선에 주력하며 ‘헌법은 100년쯤 뒤 개정해도 된다’고 말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다나카는 초등학교 졸업 학력의 공사판 인부로 출발해 총리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정책을 놓고 의회에서 논쟁이 벌어질 때면 공사판에서 일하던 경험을 피력하며 “당신들은 땀을 쏟아 가며 지게차를 밀어 본 경험이 있느냐”고 논박했다. 다나카가 의원으로 지내면서 입법한 33개의 법안은 대부분 공영주택법과 도로법 등 민생과 관련된 것이었다. 미쿠리야 다카시(御廚貴) 도쿄대 명예교수(정치학)는 “다나카는 도로·다리·철도 등 일본 전체를 개조하는 대규모 개발계획을 추진하며 눈 깜짝할 새 국민의 삶을 바꿔 놓았다. 현 정치인들과는 스케일이 달랐다”고 평했다.
때로 다나카의 계획은 허황될 정도로 장대했다. 46년 니가타(新潟)현 중의원 선거 유세에선 “니가타와 군마(群馬)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미쿠니토우게(三國峠) 고개를 다이너마이트로 날려 버리겠다. 그러면 (바닷바람이 태평양 쪽으로 빠져나가) 니가타에 눈이 내리지 않게 돼 살기 좋아질 것이다. 거기서 나온 흙으로 니가타 연안 바다를 메우는 개발사업을 하면 도쿄 사람들이 돈을 벌러 니가타로 몰려들 것”이라고 호언했다. 이 공약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지만 도쿄로 상경하는 것만을 유일한 성공의 길로 여기던 니가타 주민들을 열광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원대한 개발계획을 추진해 서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업가 출신의 아웃사이더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다나카는 현재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떠올리게 한다. 부동산개발업자 출신인 트럼프는 대규모 개발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공약해 미국 중서부 공업 지역 노동자들의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와카타베 마사즈미(若田部昌澄) 와세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본의 ‘가쿠에이 열풍’은 미국의 ‘트럼프 열풍’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정계의 엘리트 정치인들과 구분 지었고, 이념보다 실리를 앞세우며 큰일을 성사시키는 추진력이 장점으로 꼽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마사즈미를 비롯한 일부 전문가가 일본의 ‘가쿠에이 열풍’에 우려를 표하는 이유다. 마사즈미는 “일본인들이 다른 선진국 국민처럼 기성 정치에 신물이 나 있다는 사실을 ‘가쿠에이 열풍’은 보여 준다. 머지않아 트럼프 같은 정치인이 등장하기에 충분한 사회 분위기가 일본에도 조성돼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주가가 날로 치솟고 있는 하시모토 도루(橋下徹·47) 전 오사카 시장도 다나카와 트럼프처럼 기성 정치권에 반기를 드는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다. 소설 『천재』로 ‘가쿠에이 열풍’에 불을 지핀 이시하라는 2014년 일찌감치 “하시모토는 천재다. 그처럼 연설을 잘하는 사람은 젊었을 때의 다나카 말고는 본 적이 없다”며 하시모토를 다나카에 비유한 바 있다. 일각에선 ‘가쿠에이 열풍’으로 확인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반감이 하시모토 같은 반(反)엘리트주의 정치인을 향한 지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미 일부 하시모토 지지자는 오사카에 확고한 세력 기반을 가진 하시모토를 ‘오사카의 다나카 가쿠에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다나카가 남긴 또 하나의 그림자는 정경유착으로 대표되는 금권정치다. 다나카가 총리직을 지내던 74년 그의 가족 기업이 매입한 땅에 건설성이 공사를 시작하면서 땅값이 수십 배 급등하는 등 다방면에서 부당 이익을 취한 사실이 드러났고 다나카는 총리직을 사임했다. 사임 2년 뒤인 76년엔 그가 총리 시절 미국 군수업체 록히드마틴사로부터 5억 엔(약 51억원)의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 구속되기까지 했다. 다나카는 6개월 수감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뒤 정계의 배후 실력자로 활동했다.
록히드마틴 사건은 다나카를 족쇄처럼 따라다녔다. 83년 1심 재판에서 다나카는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87년 기각됐다. 다나카는 상고했고 결국 이 사건은 상고가 진행 중이던 93년 다나카가 사망하고야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처럼 스캔들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다나카의 인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다나카는 76년부터 정계 은퇴를 선언한 90년까지 있었던 5번의 중의원 선거에서 모두 당선되며 건재를 과시했다. 심지어 뇌경색으로 쓰러져 선거운동을 전혀 하지 못했던 86년 중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됐을 정도다.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나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당을 좌지우지하며 정계의 배후 실력자로 활동했다. 다나카 이후 총리를 역임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스즈키 젠코(鈴木善幸)·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는 모두 다나카의 지지에 힘입어 총리직에 올랐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가쿠에이 열풍’을 조명한 기사에서 “불명예 퇴진한 다나카가 지금 다시 인기를 얻는 것은 일본인들이 부정부패 스캔들에 관대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며 “다나카 관련 최근 저작물 가운데 그의 부패 문제를 거론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는 “돈의 힘으로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다나카의 금권정치가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지금 재계는 자민당에 후원금을 쏟아부으면서 기업에 유리한 정책이 통과되도록 만들고 있다”고 우려했다. 아베 총리의 측근이었던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전 경제재생상이 금품수수 혐의로 지난 1월 각료직에서 물러나고도 아베 정부가 지지율에 타격을 받지 않은 것도 일본의 뿌리 깊은 금권정치 실태를 보여 준다는 지적이 있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1918~93) 전 일본 총리는 전후 일본 정치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47년 정계에 입문해 72년 총리에 취임한 다나카는 고속도로·고속철도 등 인프라를 확충해 지역 균등 개발의 토대를 마련했고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이뤄 냈다. 취임 2년 반 만에 금품수수 의혹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사임 이후에도 자민당 내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히라·스즈키·나카소네 정권 등 내리 세 차례의 자민당 정권 탄생에 직접 관여해 ‘어둠의 쇼군’이란 별명을 얻었다. 2009년 54년 만에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를 이뤄 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전 민주당 대표도 다나카의 인맥이다.


다나카는 초등학교 졸업 학력의 공사판 인부로 출발해 총리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정책을 놓고 의회에서 논쟁이 벌어질 때면 공사판에서 일하던 경험을 피력하며 “당신들은 땀을 쏟아 가며 지게차를 밀어 본 경험이 있느냐”고 논박했다. 다나카가 의원으로 지내면서 입법한 33개의 법안은 대부분 공영주택법과 도로법 등 민생과 관련된 것이었다. 미쿠리야 다카시(御廚貴) 도쿄대 명예교수(정치학)는 “다나카는 도로·다리·철도 등 일본 전체를 개조하는 대규모 개발계획을 추진하며 눈 깜짝할 새 국민의 삶을 바꿔 놓았다. 현 정치인들과는 스케일이 달랐다”고 평했다.
때로 다나카의 계획은 허황될 정도로 장대했다. 46년 니가타(新潟)현 중의원 선거 유세에선 “니가타와 군마(群馬)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미쿠니토우게(三國峠) 고개를 다이너마이트로 날려 버리겠다. 그러면 (바닷바람이 태평양 쪽으로 빠져나가) 니가타에 눈이 내리지 않게 돼 살기 좋아질 것이다. 거기서 나온 흙으로 니가타 연안 바다를 메우는 개발사업을 하면 도쿄 사람들이 돈을 벌러 니가타로 몰려들 것”이라고 호언했다. 이 공약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지만 도쿄로 상경하는 것만을 유일한 성공의 길로 여기던 니가타 주민들을 열광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총리 사임 후에도 측근들을 잇따라 총리로 만들며 막후에서 활약했다. 왼쪽부터 다나카 파벌로 총리가 된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나카소네 야스히로. [중앙포토]](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612/26/htm_2016122614316224634.jpg)
다나카 가쿠에이는 총리 사임 후에도 측근들을 잇따라 총리로 만들며 막후에서 활약했다. 왼쪽부터 다나카 파벌로 총리가 된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나카소네 야스히로. [중앙포토]
와카타베 마사즈미(若田部昌澄) 와세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본의 ‘가쿠에이 열풍’은 미국의 ‘트럼프 열풍’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정계의 엘리트 정치인들과 구분 지었고, 이념보다 실리를 앞세우며 큰일을 성사시키는 추진력이 장점으로 꼽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마사즈미를 비롯한 일부 전문가가 일본의 ‘가쿠에이 열풍’에 우려를 표하는 이유다. 마사즈미는 “일본인들이 다른 선진국 국민처럼 기성 정치에 신물이 나 있다는 사실을 ‘가쿠에이 열풍’은 보여 준다. 머지않아 트럼프 같은 정치인이 등장하기에 충분한 사회 분위기가 일본에도 조성돼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주가가 날로 치솟고 있는 하시모토 도루(橋下徹·47) 전 오사카 시장도 다나카와 트럼프처럼 기성 정치권에 반기를 드는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다. 소설 『천재』로 ‘가쿠에이 열풍’에 불을 지핀 이시하라는 2014년 일찌감치 “하시모토는 천재다. 그처럼 연설을 잘하는 사람은 젊었을 때의 다나카 말고는 본 적이 없다”며 하시모토를 다나카에 비유한 바 있다. 일각에선 ‘가쿠에이 열풍’으로 확인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반감이 하시모토 같은 반(反)엘리트주의 정치인을 향한 지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미 일부 하시모토 지지자는 오사카에 확고한 세력 기반을 가진 하시모토를 ‘오사카의 다나카 가쿠에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다나카가 남긴 또 하나의 그림자는 정경유착으로 대표되는 금권정치다. 다나카가 총리직을 지내던 74년 그의 가족 기업이 매입한 땅에 건설성이 공사를 시작하면서 땅값이 수십 배 급등하는 등 다방면에서 부당 이익을 취한 사실이 드러났고 다나카는 총리직을 사임했다. 사임 2년 뒤인 76년엔 그가 총리 시절 미국 군수업체 록히드마틴사로부터 5억 엔(약 51억원)의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 구속되기까지 했다. 다나카는 6개월 수감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뒤 정계의 배후 실력자로 활동했다.
록히드마틴 사건은 다나카를 족쇄처럼 따라다녔다. 83년 1심 재판에서 다나카는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87년 기각됐다. 다나카는 상고했고 결국 이 사건은 상고가 진행 중이던 93년 다나카가 사망하고야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처럼 스캔들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다나카의 인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다나카는 76년부터 정계 은퇴를 선언한 90년까지 있었던 5번의 중의원 선거에서 모두 당선되며 건재를 과시했다. 심지어 뇌경색으로 쓰러져 선거운동을 전혀 하지 못했던 86년 중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됐을 정도다.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나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당을 좌지우지하며 정계의 배후 실력자로 활동했다. 다나카 이후 총리를 역임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스즈키 젠코(鈴木善幸)·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는 모두 다나카의 지지에 힘입어 총리직에 올랐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가쿠에이 열풍’을 조명한 기사에서 “불명예 퇴진한 다나카가 지금 다시 인기를 얻는 것은 일본인들이 부정부패 스캔들에 관대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며 “다나카 관련 최근 저작물 가운데 그의 부패 문제를 거론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는 “돈의 힘으로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다나카의 금권정치가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지금 재계는 자민당에 후원금을 쏟아부으면서 기업에 유리한 정책이 통과되도록 만들고 있다”고 우려했다. 아베 총리의 측근이었던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전 경제재생상이 금품수수 혐의로 지난 1월 각료직에서 물러나고도 아베 정부가 지지율에 타격을 받지 않은 것도 일본의 뿌리 깊은 금권정치 실태를 보여 준다는 지적이 있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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