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이동식의小窓多明] 나루터를 묻다

바람아님 2017. 4. 3. 23:51
세계일보 2017.04.03. 21:56

대권후보에 줄 선 자문교수들
자기 영달만 찾아서는 안 돼
난세의 시국 바른 길로 이끄는
'문진(問津)의 정신' 되새겨야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을 보면 장저(長沮)·걸익(桀溺)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는데, 공자가 지나가다가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터를 물어보게 하는 장면이 있다. 장저가 “수레 고삐를 잡은 이는 누구요” 하고 묻기에 자로가 “공구(孔丘)라고 합니다” 하니, 장저가 “노나라 공구라는 사람이요? 그는 나루터를 알 것이다”고 하였다. 다시 걸익에게 물으니 “천하의 도도한 물결이 다 그러한데 누가 바꾼단 말이오. 사람을 피해 다니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나을 것이오” 하고 여전히 김을 매었다. 자로가 그 내용을 가지고 가서 공자에게 고하니 공자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하기를 “조수(鳥獸)와는 함께 살 수 없는 법이다. 내가 이 백성들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바꾸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이 일화는 ‘나루터를 묻다(問津)’란 제목으로 유명하다. 장저와 걸익이라는 도가(道家) 계열의 은자(隱者·숨어 있는 현인)들이 공자에 대해서 비판하는 내용을 통해 공자 스스로의 생각을 밝힌 것이다. 나루터라는 것은 강이라는 자연적인 난관을 건너가는 출발점이라면, 나루터를 찾는다는 것은 곧 이 세상 사람들이 편안하고 의미 있게 사는 방법을 물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 계열인 장저와 걸익 두 사람은 공자가 왜 그렇게 세상의 혼탁함 속에 들어가 애를 쓰려고 하느냐, 세상을 떠나서 조용히 사는 것을 보여주면 그것으로서 세상이 좋아지지 않겠느냐고 되묻는 것이고, 여기에 대해 공자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그 세상을 바꿔가야 좋은 세상이 오지 않겠느냐, 그저 자기 한 몸의 평안만을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뜻으로 해서 ‘문진(問津)’이란 말은 흔히 학자나 선비들이 세상의 길을 묻는다는 뜻으로도 즐겨 쓰이고 있다. 학문을 하는 목적은 세상의 어려움을 피하지 말고 세상 속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바른 삶을 이끄는 게 본분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 중기의 학자인 주세붕(周世鵬·1495~1554)은 일찍이 ‘문진가’라는 시조를 통해 “밭 가는 저 할아비 문진을 비웃지 말게나 / 사람이 되어서 조수(鳥獸)를 벗할 것인가 / 마음에 잊지 못하여 오락가락하노라”라고 하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워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 나선 것이다. 이러한 주세붕의 생각은 퇴계 이황에 의해 받아들여져, 이황은 왕에게 아뢰어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리게 함으로써 서원이 선비들의 교육기관으로 정부의 공인을 받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화여대의 최재천 석좌교수가 몇해 전부터 여러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모이는 ‘문진포럼’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도 이러한 뜻이라 보인다. 강 건너로 상징되는 우리의 목적지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인문사회학과 자연과학이 함께 찾아가자는 뜻이리라.


그런데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우리 정치사를 보면 선거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앞장서겠다며 대학에 있는 많은 학자가 대통령 후보 측근에 가서 이름도 멋진 많은 포럼을 만들고 거기서 갖가지 정책 자료집을 내놓고, 선거가 끝난 후에는 논공행상에 따라 자리를 차지했지만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해 불명예 퇴진하거나 감옥에 가고, 역대 대통령의 정치도 거의 모두 실패한 것을 보면 그들 학자의 ‘문진’이 잘못된 방향으로 추진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 바른 정치를 해서 국민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그들의 주장이 결국에는 자신들의 안위와 복록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분석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인조 때 당시의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벼슬보다는 향리인 경남 함안에서 바른 소리를 하고 인재를 가르쳐 이름이 높았던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1585~1664)는 당시 선비들의 권력만을 탐하는 행태를 보고는 “세상 선비들이 말하는 학문이란 / 글을 배워 잘 외워 읽는 것 / 세상 선비들이 말하는 사업이란 / 글짓기를 일삼아 작록을 따는 것 / 마음과 입이 서로 맞지 않고 / 말과 행동을 서로 돌아보지 않네 / 비록 만 권의 책을 독파했다 한들 / 덕행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네”라고 ‘세유탄(世儒歎)’이란 글에서 한탄을 했다(간송집(澗松集)


바야흐로 자리가 빈 대통령이 누가 되는가를 놓고 많은 후보가 나섰고 연구와 강의를 하던 교수, 학자들이 후보의 자문단이란 이름으로 대거 등장하고 있다. 새로운 이름도 있지만 몇 차례 말을 바꿔 타는 사람도 눈에 띈다. 올 대한민국의 봄은, 그렇지 않아도 지구온난화로 뜨거운데 대권을 얻기 위한 열기로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그런데 경선 과정에서 정책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토론보다도 상대방의 신상이나 약점을 물고 뜯는 사례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자문을 제대로 하는지 걱정이 들기도 한다. 저마다 세상을 건네주는 나루가 되겠다고 외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복록만을 추구하는 사이비 선비가 그중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강을 건너는 배도 작은 배가 아니다. 문득 그 옛날 공자가 고민한 나루터, 곧 진정으로 국민과 세상을 위하고 바른 세상으로 인도할 나루터는 어디인지, 지금 세상에 맞는 큰 배를 끌고 갈 진정한 선장과 선원은 누구인지를 다시 묻게 되는 것이다.


이동식 언론인·역사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