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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33] 단풍

바람아님 2013. 9. 4. 18:50

(출처-조선일보 2009.11.23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숲의 나뭇가지 끝에도/가을은 젖어/금빛으로 타오른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백하건대, 중학교 2학년 시절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던 내 시 '낙엽'의 첫 구절이다. 금년 단풍도 어제오늘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사뭇 삭연해 보인다. 해마다 어김없이 드는 단풍이지만 한 번이라도 도대체 왜 나무들은 이토록 아름다운 색의 향연을 펼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단풍은 나무가 겨울을 나기 위해 잎을 떨어뜨리는 과정에서 잎자루 끝에 떨켜가 생겨 그동안 초록빛을 내는 색소인 엽록소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카로틴이나 크산토필과 같은 색소들이 드디어 빛을 발산하며 나타나는 자연현상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단풍의 색이 '어떻게(How)' 만들어지는가를 묻는 게 아니다. 생물학에서 '어떻게'에 못지않게 중요한 '왜(Why)'를 묻고 있다.

피는 왜 물보다 진할까? 피는 왜 그저 물과 같은 색을 띠지 않고 새빨간 빛을 띠게 되었을까? 우리 몸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유독 피만 거의 원색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한 색을 띠고 있다. 왜? 살을 베였거나 각혈을 할 때 피가 만일 그저 물과 같은 색을 띤다면 과연 지금처럼 다급한 심정을 느낄 수 있을까? 강렬한 색의 진화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알려진 '유전자의 관점'은 사실 다윈 이래 가장 위대한 생물학자라는 칭송을 받았던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의 이론에서 나온 것이다. 해밀턴에 따르면 단풍의 화려한 색깔은 나무가 해충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계신호이다. 단풍 색소를 만들려면 상당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건강한 나무라야 보다 화려한 색을 띨 수 있고, 그 화려한 색은 해충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내 몸에 알을 낳으려면 내년 봄에 내가 만들 독한 대사물질에 고생할 네 자식들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해밀턴은 이 연구의 결과를 미처 발표하기도 전인 2000년 1월 에이즈 바이러스의 기원을 연구하러 아프리카에 갔다가 급성 말라리아에 걸려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듬해 영국왕립학회는 고인을 제1저자로 하여 논문을 발표했고, 그로 인해 우리는 단풍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얻었다. 건강한 나무들이 고운 가을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