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4.11 팀 알퍼 칼럼니스트)
걸 그룹 흥미 시들해지고 근육도 빠져나가 우울해져
중년의 위기 탈출 꿈꾸며 英 남자들 오토바이 타고 韓에선 머리 눈썹 염색
40세, 나쁘지만은 않더라!
나는 올해 40세가 됐다. 사실 한국 나이로 따지자면, 진작에 40세가 됐다.
하지만 나는 영국 출신이라 한국 나이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아직은 40세가 안 되었노라고 지난해 내내 되뇌었다.
내 또래, 또는 나보다 먼저 겪은 이들은 잘 알겠지만, 40세가 된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아버지의 40세 생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아버지는 동업으로 치과를 꽤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계셨다.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단란한 가정의 가장으로 적당한 크기의 집과 자동차 두 대를 소유했고
가끔 가족끼리 휴가를 떠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아버지에 비하면 40세 되도록 내가 이룬 것은 참으로 보잘것없게 느껴진다.
물론 당시 아버지에게도 세상이 온통 장밋빛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청춘을 떠나보내고 40대에 접어든 여느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빚을 갚느라 정신없으셨을 테고,
많은 스트레스와 고민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이다.
30대는 그런대로 잘나가는 시기이다. 한 결혼 정보 회사는 회원의 평균 연령이 남자 36세, 여자 33세라고 한다.
현대사회의 결혼 적령기는 외모는 아직 젊어 보이지만 충분한 인생 경험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을 만큼
축복받은 30대이다. 그러나 40세가 되고 보니 모든 게 빠른 속도로 변하기 시작한다.
근육은 약해졌고, 피부는 처지기 시작했다.
정치적 성향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10년 전 입었던 옷은커녕 지난해 입던 옷도 몸에 맞지 않고, 만성 피로에 시달린다. 우울하게도 엄청난 양의 새치가
머리뿐 아닌 몸 여기저기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날아오는 총알도 튕겨낼 것같이 느껴지던 30대 때는 몰랐던 세상이다.
40세가 되니 회사 생활 또한 매우 이상해진다.
갑자기 신입 사원들이 너무 어려 보이고, 그런 학생 같아 보이는 동료와 진지한 업무 대화를 나누기가 어색해진다.
매번 그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사원들이 무언가를 요청할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런 외침이 들린다.
"중학생처럼 보이는 너희가 감히 뭘 알기나 한다고!"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달라진 것은 또 있다. 이제 더는 걸 그룹에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관심을 주던 모든 걸 그룹은 이미 해체됐고 새로 생겨나는 걸 그룹은 내 딸뻘이라 할 만큼 어리다.
영국의 40대는 악명 높은 '중년의 위기'를 경험한다.
중년의 위기는 본인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나이 듦과 관련된 자기만의 행동이다.
예를 들어 남자들은 불쑥 할리 데이비드슨을 사거나 처박아 둔 전자 기타를 다시 꺼내 록밴드에 들어가겠노라 선언하기도 한다.
반면 한국에서 중년의 위기는 일반적 현상 같지 않다. 중년의 위기를 드러내놓고 겪는 한국 40대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이 듦을 거부하는 것은 한국 중년도 마찬가지이다. 증거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목에 수건을 두른 아저씨가 머리와 눈썹에 염색 거품을 잔뜩 묻히고 이발소 밖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무엇인가를 바라다보는 광경보다 더 한국적인 것은 없다.
나는 머리에 염색 거품을 잔뜩 묻힌 한국 중년 남자들을 보며 속으로 낄낄대곤 했다.
그런데 이제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나 또한 그 염색 거품을 묻혀야 할 것 같다.
최근 40대로 진입한 우울함을 벗어날 방법을 찾고자 인터넷을 검색했다.
영국 여러 사이트에서 찾은 것은 내 40대를 더욱 우울한 시절로 만들었다.
폐경기, 전립선 검사, 학비, 그리고 연금 등에 대한 절로 탄식이 나올 내용이 전부였다.
낙담하고 한국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뉴스 사이트 기사 아랫부분에서 어떤 연령대가 해당 기사에 댓글을 달았는지를
보여주는 통계 자료를 발견했다. 연령대별 인기 기사 리스트를 보여주는 포털 사이트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40대가 가장 많이 읽은 기사 목록 상위권에 있는 내용이 내게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또한 40대에게 가장 많은 댓글을 받은 기사에서 가장 공감이 가고 흥미로운 댓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반면 20대가 주로 읽은 기사는 재미없고 댓글마저 지루했다.
40대가 된다는 사실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가 20대, 그리고 30대까지도 신경 쓰고 관심 갖던 것들은 이제 더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흥미로운 기사에 댓글을 달았던 40대 한국 남자들이 여가를 어떻게 즐기는지 갑자기 떠올랐다.
사우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조기 축구회에 가입하거나 당구를 치고, 패션 따위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소주를 즐겨 마신다. 이제 이런 일은 내게도 너무나 큰 즐거움이 되어간다.
40대 클럽에 가입할 준비가 된 것이다.
영국인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인생은 40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볼 시간이다.
자, 이제 40대를 신나게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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