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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읽는 세상] 아무나 할 수 없다, 원효만!

바람아님 2017. 5. 3. 07:11

(조선일보 2017.05.03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신라 왕비 낫게 할 처방으로 용왕은 藥 아닌 佛經 건네며 "원효에게 경을 說하게 하라"

왕비의 病은 백성의 고통 의미

왕비 치료할 인물로 원효 택했듯 나라 이끌 적임자 제대로 뽑아야


고통은 어디에서 올까? 오늘 오신 부처님이 이르시길, 집착에서 온다고 한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란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 괴로우니. 

그러나 그 사실을 머리로 안다고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 자리가 바로 내가 태어난 자리이고, 내 삶의 켜가 쌓여가는 자리인데.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스님이라 할 수 있는 원효를 두고도 당대 고승들이 

시기하고 미워했던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집착과 미움을 제대로 감당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겠다. 

원효의 이야기는 송나라에서 편찬한 '고승전'에도 나온다.


신라국 왕비가 병이 들었다. 뇌에 종기가 난 것이다. 

왕비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온 나라가 정성을 쏟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그때 한 무당이 예상치 못한 약방문을 내놨다. 

왕비를 치료할 약을 구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다. 

약을 구하러 가기 위해 서해 바다를 건너는 사신의 배는 풍랑을 만나고, 

풍랑 속에서 한 할아버지가 나타나 그를 용궁으로 안내했다. 

용왕 금해가 사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왕비의 병을 고치는 약으로 용왕이 준 것은 알약이 아니라 경전이었다. 

용왕 금해는 30쪽가량 종이뭉치를 사신의 허벅지 속에 넣고 꿰매주었다. 바로 '금강삼매경'이었다. 

"인간의 세계로 돌아가 경을 꺼내 대안에게 주어 그 순서를 맞추게 하고, 원효에게 그 경을 설하게 하라.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왕비의 병이 나을 것이다."


희한하지 않은가. 아픈 것은 왕비의 몸인데, 그 약이 경(經)이고 깨달음이라니. 

그러니까 일심(一心)의 근원자리를 설하고 있는 금강삼매경은 왕비의 병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병고(病苦)로서 양약(良藥)을 삼으라고 했나 보다. 

병이 있는 자리, 고통이 있는 자리가 깨달음이 생기는 자리다. 

왕비는 누구인가? 왕국에서 왕비는 드러나지 않은 중심이다. 

공화국이라면 국민이겠다. 왕비가 병이 들었다는 것은 세상이 중심에서부터 병들었다는 것이다. 

하늘이 내고 바다가 낸, 하늘 아래 백성이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 아니겠는가.


기습적으로 우리 삶을 덮치는 고통 속에서 괴롭다고, 아프다고 속울음을 삼키는 우리의 눈물이 금강삼매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아무나 그 길을 놓지 못한다. 

진흙 같은 고통에서 연꽃이 피기 위해서는 대안이 맞추고, 원효가 설해야 한다. 

대안은 누구인가. 큰 평안이라는 이름의 그는 그 누구도 원효를 알아보지 못했을 때 원효를 알아본 허름한 노인, 

누더기 속에 자기를 감추고 다닌 현자다.


마침내 황룡사에서 금강삼매를 설하는 원효가 이렇게 입을 여니 스님들이 부끄러워 참회를 했단다. 

"옛날 서까래 백 개를 가지고 지붕을 덮을 때는 내가 없더니 오늘 한 개의 상량을 걸칠 때는 오로지 나 홀로 책임을 지는구나."


과거 인왕경 법회 때 큰스님 100명이 초청되었다. 

그런데 스님들은 눈에 보이는 작은 흠집을 들어 원효 초청을 반대했고, 그 때문에 원효는 그 집회에 초대받지 못했다. 

부끄러워 참회를 했다는 스님들은 자신의 짧은 안목에 대한 참회였겠으나 

어찌 원효가 과거 초청되지 못한 데 대한 앙갚음으로 그런 말을 했겠는가.


대들보 감이 있고 서까래 감이 있다. 서까래가 아무리 기웃거려도 대들보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뭐든 자기 자리가 있다. 자기 자리를 잘 찾아가고 찾아주는 것, 정치에서는 그 기초가 선거다. 

아무나 할 수 없고 아무에게나 맡겨서도 안 된다. 

원효의 사자후(獅子吼)만이 왕비의 병을 고칠 수 있었듯, 든든하게 집을 유지하게 하는 대들보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