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나 언어적 유사성이 거의 없고, 문화적 배경까지 다른 영어로 설국을 번역한다는 건 엄두를 내기조차 어려운 일이지 않았을까.
번역자 사이덴스티커가 바로 이 일을 해낸다. 사실 사이덴스티커의 번역이 없었다면 야스나리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불가능했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번역이 없었다면 작품이 서구에 알려질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고, 설령 다른 번역본이 있었다 할지라도 사이덴스티커의 번역만큼 서구인들에게 감흥을 주는 번역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이덴스티커의 번역은 많은 부분 의역에 비중을 두고 있다. 앞서 말한 특유의 난점들 때문이다. 직역을 했을 경우 본문의 뜻과 너무 다른 의미가 되거나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의역 때문에 사이덴스티커는 종종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의역을 하다 보니 몇몇 부분이 원작과 달리 변형됐다는 비판이다.
사실 이 문제는 번역을 두고 벌어지는 오랜 논쟁거리다. 필자 생각은 이렇다. 직역이 좋다거나 아니면 의역이 좋다고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단지 결과적으로 봤을 때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이 있을 뿐이다.
사이덴스티커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몰랐을 리가 없다. 그는 당시 유네스코와 공동으로 일본 문학작품을 번역하고자 하는 뉴욕의 크노프 출판사에 '설국'을 추천하면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몇 안 되는 것에 의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상징적인 말인가. 우주와 자연과 사랑과 이별과 생과 사라는 엄청난 주제가 '설국' 속에서는 너무나 작은 것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사이덴스티커는 번역의 난점을 해소해 보고자 수차례 야스나리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때 이야기가 그의 책 '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에 나온다.
"설국에는 알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와바타 씨와 의논을 했다. 그는 친절하게 응해주기는 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선생님 이 부분은 좀 난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그는 성실하게 읽은 후 "그렇군요"라고 대답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러니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벽안의 번역자와 야스나리가 나눈 선문답이 참 재미있으면서도 답답하다. 달리 서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뼛속에 들어 있는 동양 정신과 가치관 그리고 자신의 문학적 주술이 만들어낸 미학에 대해 야스나리는 달리 무슨 설명을 할 수 있었겠는가.
서구의 합리적 사고와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사이덴스티커 역시 더 이상 무슨 해답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한 가지 중요한 건, 사이덴스티커는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동양적인 '그 무엇'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느낌에 대해 그는 성실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했을 것이다.
사이덴스티커는 어느 기념강연에서 이렇게 고충을 털어 놓기도 했다.
"사람들은 '설국'이 번역 불가능한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 역시 이 작품을 번역 불가능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어의 사용이 너무 미묘하고, 너무도 모호합니다. 일부러 모호한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소설은 번역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모순되는 말이지만, 번역 불가능한 것도 번역해야 합니다. 번역하는 것은 번역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사이덴스티커가 '설국'의 주요 부분을 어떻게 번역했는지를 살펴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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