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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小窓多明] 흉노족 무덤 발견의 충격

바람아님 2017. 5. 30. 09:39
세계일보 2017.05.29. 21:36

옛 은나라 수도서 무덤 18기 발굴
유목민 기본 식기구 금속 솥 나와
김해 가야 유적 솥과 연관성 느껴
우리 역사와 연결고리 연구 기대

한국에서 역사적인 대통령 선거를 이틀 앞둔 지난 5월 7일 중국 허난(河南)성의 은허(殷墟)에서는 희귀한 고분과 유물이 공개됐다. 이곳에서 흉노족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 18기가 발견된 것이다.


무덤이 발견된 곳은 허난성 안양(安陽)시 인두(殷都)구, 곧 옛 은(殷)나라의 수도가 있던 곳의 다쓰쿵(大司空)이라고 하는 한 촌이다. 무덤은 벽돌로 사람 들어갈 정도로 그리 크지 않게 나란히 만들었는데, 18기의 무덤 모두에서 청동과 쇠로 만든 솥(?)이 나왔다. 한자 발음으로 ‘복’이라고 읽는 이 솥은 2리터쯤 물이 들어가는 둥그렇고 길쭉한 물통 형태로, 맨 위 양쪽에 나 있는 고리에 나무나 쇠를 꿴 뒤 양쪽으로 세운 받침대에 걸고서 그 밑에 불을 때어 물을 끓여 양고기나 야채 등을 삶아 먹을 수 있게 한, 이동을 주로 하는 유목민족들이 가장 편리하게 사용하는 기본 식기구이다. 이 솥은 사용한 흔적까지 남아 있는데 이것을 무덤마다 묻었다는 것은 무덤의 주인공이 유목민족, 그중에서도 흉노족이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중국 역사 고고학계에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흉노족 무덤이 나온 곳은 지금까지 흉노의 영역으로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던, 중국 깊숙한 내륙이고 그것이 하필 은나라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이 무덤들은 은나라 말기의 무덤군 위에 조성돼 있어서 시기적으로는 후한(後漢) 말기에서 위(魏), 진(晋) 초기, 즉 지금으로부터 약 18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 학자들은 보고 있다. 무덤에서는 금귀고리에다 옥목걸이, 그리고 철제단검도 나왔다고 한다. 모두 유목민족들이 쓰다가 무덤에 묻은 것들이다.

국내 언론이 거의 다 주목하지 못했지만 이 무덤은 우리 역사와 중요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이번에 나온 쇠솥과 같은 형태의 솥이 1990년대 초 경남 김해의 대성동 유적의 29호분과 47호분에서 나왔고 양동리 235호분에서도 나왔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금관가야의 왕족들의 무덤인데 여기에서 쇠솥이 나온 것은, 이들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밝히는 귀중한 단서가 된다. 무덤에서 나온 단검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고대 유목민이 쓰던 이른바 아키나케스 단검(短劍)일 것이다. 이 단검은 흑해에서 중국 북부, 한반도에까지 분포하고 있다. 거기에 금귀고리가 있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 경주나 김해 어느 곳에서 막 발굴된 무덤을 보는 듯하다.


중국 내에서의 흉노족은 우리 역사와 연관이 깊다. 신라 문무왕 비문에는 자신이 후한(後漢) 무제(武帝)에게서 투후(?侯)라는 작위를 받은 흉노족 김일제(金日?)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는데, 우리 역사가들은 흉노족 김일제가 조상이라는 설은 믿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1954년에 중국 장안에서 발견된 신라부인 김씨의 묘비에도 “먼 조상의 이름은 일제(김일제)이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한에 투항하여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고 쓰여져 신라 왕실과 흉노와의 관련성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은(殷), 요즘은 상(商)이라고 하는 나라는 시조신화로 “(목욕을 갔던) 간적이 제비알을 삼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설(契)이다”라고 알에서 태어났다고 밝히고 있어(사기 은본기), 우리의 고구려나 신라와 같은 난생신화계통이고, 이 때문에 은나라와 우리가 같은 동이족이라는 주장이 이어져 오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은나라의 수도인 은허에서 옛 은나라 사람들 무덤 위에 조성된 18기의 흉노족 무덤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들이 후한시대부터 그 이후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흉노족의 영역도 아닌 하남성 은허에 왜 흉노인들이 대를 이어 모여 살았을까. 중국 학계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이 분야에 심층연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공자의 고향이자 동이의 땅으로 유명한 산둥성 취푸(曲阜)에는 중국의 전설시대 인물인 소호 금천씨(少昊 金天氏)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이 고구려나 백제의 무덤처럼 중국에 거의 없는, 사각의 피라미드인 것이 특이한데, 앞에서 본 신라부인 김씨의 묘비에는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 금천이라 하는데, 이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김씨)의 세조(世祖)이시다”라고 뚜렷이 밝히고 있다. 즉 김일제 이전에 소호 금천씨가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것인데, 이 신라부인 김씨는 당나라 사람의 후처로 들어가 장안(長安)에서 살다 864년에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기에 문무왕 김춘추에 이어 훨씬 후대사람들까지 자신들의 시조를 그렇게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옛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을 중국의 명문가에 함부로 연결짓는 사례가 많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뚜렷이 밝힌 것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고 하겠다. 어떤 연구가들은 김일제는 한나라 무제가 죽은 이후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에서 대우를 받다가 후한이 일어난 뒤 동북쪽으로 도망가 살게 된 과정을 밝혀냈는데, 이것도 신라부인의 비문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하면 김일제의 후손이든 누구든 흉노족들은 은나라의 수도 은허가 그들의 조상의 땅이라고 알고 거기서 터를 잡고 살다가 묻힌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들 속에서 우리 역사와의 연결고리도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본다. 앞으로 중국에서의 심층연구가 몹시 기다려진다.


이동식 언론인·역사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