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6.03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 대표)
[남정욱의 명랑 笑設]
세계대전 앙금 남아있던 獨·佛 화해한건 1963년
우호조약 먼저 맺은 후 조금씩 이해의 폭 넓혀…
국제 분쟁의 해법… 우리는 언제쯤 터득할까
독일·프랑스·영국 세 나라의 근·현대사를 보면 대체 이들이 어떻게 같은 하늘을 이고 살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영국이 너무너무 싫었던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 때 미국에 자금을 대주다 나라가 망할 뻔했다.
나폴레옹에게 두들겨 맞은 기억이 선명했던 독일은 보불전쟁으로 원수를 갚았고, 이때의 치욕을 잊지 못한 프랑스는
이 적개심을 1차 대전으로 끌고 갔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로 초침이 돌기 시작한 1차 대전의 시계가 독일·프랑스·영국을 포함한 여덟 나라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데 걸린 시간이 겨우 한 달이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분쟁이 상시 대기 상태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렇게 가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프랑스와 독일이 우호 조약을 체결한 게 1963년이고 이것이 현재
유럽연합의 기원이다. 용서해서 화해한 거 아니다. 필요해서 화해했고, 나중에 서로 조금씩 이해하고 용서했다.
교전국 간의 복수는 전쟁 피해 배상금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1차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1320억마르크라는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물었다. 그 여파로 1922년 2마르크였던 우편 요금이
1923년 1000억마르크로 뛰어오르는 살인적인 인플레가 발생한다. 형은 술만 마시고 동생은 열심히 돈을 모았는데 동생의
저축은 휴지가 되고 형의 빈 술병은 빵빵한 자산이 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이때의 일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샌프란시스코조약이 체결된다.
미국 등 연합국 48개국과 일본이 맺은 조약으로 일본은 대만과 사할린 남부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고 배상금을 물었으며
한반도의 독립을 승인했다. 이 조약에 우리는 참여하지 못했다. 패전국의 식민지라는 짜증 나는 신분 때문이었다.
그러면 식민 지배를 둘러싼 배상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없다. 놀랍게도 이제껏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이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역사는 결국 강자의 기록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승만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하는 흉내만 냈다. 본인의 반일 감정에 국민의 심리적 저항도 이유였지만 맞받아치는
일본의 요구 사항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패전 후 일본이 한반도에 남기고 간 재산이 대략 50억달러였고
이 중 20억달러가 남한에 있었다. 이걸 토해내라 할까 봐 이승만은 배상금이라는 있지도 않은 명목으로 일본에 22억달러를
내놓으라 우겼던 것이다. 외자 도입이 절실했던 박정희 정부는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이를 뒤에서 조정한 것이 미국이었다.
무상 원조의 부담과 동아시아 정세 재편이 절실했던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계속 척진 상태로 지내는 것이 불편했다.
일본 역시 미국의 요구를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한·미·일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그럭저럭 맞아떨어져 성사된 게 한·일 국교 정상화였다.
2017년은 정상화 52주년이고, 오늘은 6·3사태 53주년이 된다.
박정희가 내걸었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르고 교문을 뛰쳐나온 학생들은 이런 복잡한 국제정치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한·일 국교 정상화를 두고 아직도 식민 지배 고통의 시간을 박정희가 헐값에 팔아먹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넓은 눈으로 세상을 볼까.
화해 먼저 하고 나중에 용서하는 국제 분쟁의 해법을 우리는 언제나 터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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