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人文,社會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3] 천재지변(天災地變)

바람아님 2013. 9. 16. 08:32

(출처-조선일보 2010.01.25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역사 속의 오늘은 특별히 천재지변과 관계가 깊은 것 같다. 2주일 전 아이티에서 일어난 지진이 여전히 우리 마음을 뒤흔들고 있지만, 1월 26일 오늘은 공교롭게도 대규모 지진이 여러 번 일어난 날이다. 1531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강타한 지진에 의해 수천 명이 죽은 것을 시작으로 1700년에는 캐나다 밴쿠버로부터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0㎞에 걸쳐 리히터 규모 8.7~9.2의 지진이 발생했다. 2001년에는 인도의 카치 지방에 지진이 일어나 2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가 하면 1978년 오늘에는 미국 역사상 동계 최저 저기압의 영향으로 오하이오주와 5대호 주변에 시속(時速) 161㎞의 바람이 몰아치며 엄청난 양의 눈이 쏟아졌다.

천재지변은 우리 인간을 겸허하게 만든다. 이번 아이티 지진의 최종 사망자 집계가 어떻게 나올지는 좀 더 기다려봐야 알겠지만, 역대 가장 큰 인명 피해를 가져온 지진은 1556년 중국 산시(陝西)에서 일어났는데 무려 83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1755년 또다시 포르투갈 리스본을 덮친 지진이 그 다음으로 거의 7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리스본 지진은 당시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리스본 참사를 지켜본 볼테르는 '캉디드'에서, '참 좋으신 하느님'이 지켜주는 이 세상은 가능한 모든 세상 중에서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주장했던 라이프니츠의 철학사조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지진이나 폭설(暴雪) 같은 천재지변은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포세이돈이 우리 인간을 벌하기 위해 지진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벌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사람만 당하는 것은 절대 아닌 듯싶다. 아쉽게도 천재지변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 결코 권선징악의 법칙에 의해 다스려지는 게 아님을 가르쳐준다.

오늘은 또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청년 이수현이 일본 도쿄 신주쿠 근방 신오쿠보 역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전동차에 치여 숨진 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일본인들도 자기 나라 주정뱅이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반듯한 이웃나라 청년의 죽음에 고개를 젓는다. 이런 죽음들에서도 끝내 의미를 찾으며 서로 부둥켜 일어서는 우리 인간은 참으로 긍정적인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