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중앙시평] 스티브 잡스는 청와대에 갔을까

바람아님 2017. 8. 2. 09:21
중앙일보 2017.08.02. 01:06

'갓뚜기'와 '착한 기업' 신드롬
하지만 그 잣대가 지나치게
경영자의 품성에만 맞춰져 있다
스티브 잡스도 청와대 못 갔을 것
창의성·실적으로 기업 평가해야
이철호 논설주간
SK하이닉스가 2분기에 3조507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SK가 2012년 하이닉스를 인수할 때 3조3747억원을 들였으니 석 달 만에 그 돈을 다 뽑아낸 것이다. SK는 인수합병 때 유난히 ‘인수 후 통합(PMI)’을 중시한다. 그래서 현장을 샅샅이 훑어 미묘한 조직문화까지 정밀하게 살핀다.

SK 최태원 회장이 하이닉스 인수를 결심한 경영상의 이유는 간단하다. SK텔레콤은 매년 1조5000억원의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냈다. 반면에 하이닉스는 반도체 호황 때는 떼돈을 벌지만 2002, 2009년에는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최 회장은 이 두 회사를 합치면 ‘안정+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하이닉스가 3위 엘피다(시장점유율 14.6%)를 따돌리고 삼성전자(41.6%)에 이어 확실한 2위(23.4%)를 차지한 것도 돋보였다.


하지만 SK가 1조원의 웃돈까지 얹어 하이닉스를 인수한 진짜 이유는 현장실사 때문이다. 당시 인수 책임자였던 P사장은 “망한 거나 다름없는 경기도 이천 공장에 묘한 헝그리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하이닉스는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웠다. 공기 단축과 투자비용을 아끼기 위해 겨울철에는 버너를 때서 콘크리트를 말려가며 생산라인을 깔았다. 임직원들의 눈빛도 살아 있었다. 방진복을 입고 일하는데도 오로지 눈빛으로만 소통해 냈다. ‘고난의 행군’ 동안 임직원들이 똘똘 뭉친 것이다.


‘신주 발행’도 신의 한 수였다. SK는 인수자금의 66%인 2조3426억원을 하이닉스 신주에 쏟아부었다. 이 돈이 하이닉스로 흘러들어가 설비투자의 종잣돈이 됐고, 이듬해부터 반도체 호황의 사이클을 타는 데 성공했다. 하이닉스는 2013년 3.3조원, 2014년 5.1조원, 2015년 5.3조원, 2016년 3조원의 엄청난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하이닉스와 정반대의 운명이 대우조선해양이다. 2015년 11월 3일 여의도 증시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한 매체가 ‘SK가 대우조선을 인수한다’고 보도하면서 대우조선 주가는 삽시간에 20% 넘게 폭등했고, SK의 시가총액은 순식간에 4조원이나 증발했다. 곧바로 ‘사실무근’이란 공시가 나오면서 파문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당시 SK그룹 PM(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팀의 고위 임원이던 K고문은 “비밀리에 대우조선 인수를 검토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그해 7월 말 대우조선은 3조원의 영업적자를 공개해 박근혜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공교롭게 보름 뒤 “경제 살리기에 힘써 달라”는 주문과 함께 최 회장이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당시 SK는 하이닉스의 호황으로 유동성이 흘러넘쳤다. 2009년 포스코와 대우조선 입찰을 시도한 인연도 있었다. SK는 사면에 따른 최 회장의 부채의식까지 작용해 대우조선 인수를 물밑에서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남 거제도 실사를 다녀온 PM팀의 보고서가 올라오자 SK는 곧바로 인수를 단념했다고 K고문은 털어놓았다. “노조가 너무 세고 우리와 기업문화도 안 맞았다. 아직 퇴근 전인데도 대우조선 작업복 차림으로 식당에서 고스톱을 치는 장면이 여기저기서 목격됐다는 대목이 가장 눈에 거슬렸다. 4조원 넘는 공적자금을 받은 회사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한 일간지도 똑같은 보도를 했다. ‘대우조선 노조 대의원 4명이 조선소 밖 노동단체 사무실 테이블 위에 포커 카드와 현금을 놓고 있다가 현장 기자에게 목격됐다’는 것이다. 대우조선의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


얼마 전 청와대가 대기업들과 호프데이를 연 뒤 ‘착한 기업’ 신드롬이 대단하다. 상속세 잘 내고, 라면값 동결하고, 정규직 비율이 높은 오뚜기를 ‘갓(god)뚜기’라며 떠받들고 있다. 하지만 기업은 도덕성에 앞서 창의성과 실적, 그리고 임직원 전체에 의해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요즘 ‘착한 기업 대 나쁜 기업’의 잣대가 지나치게 경영자의 품성에만 맞춰진 느낌이다. 하이닉스와 대우조선의 운명은 경영자가 아니라 오히려 직원들에 의해 엇갈렸다.


만약 다음과 같은 경영자라면 청와대 초청을 받았을지 궁금하다. 그는 7조원이나 벌고도 기부에는 인색했다. 그는 ‘새 차는 6개월 후 번호판을 달아야 한다’는 법률 허점을 노려 6개월마다 최고급 벤츠 스포츠카를 바꿔 타며 평생 번호판 없는 차를 몰았다. 그는 본사에는 10만 명만 고용하고 하청업체를 통해 50만 명의 저임금 근로자를 쥐어짰다. 세금은 조세회피지역을 이용해 최대한 깎았다. 아마 한국이었다면 ‘갑질’에다 ‘악질’ 경영자로 청와대 초청은커녕 광화문에서 몰매를 맞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가장 위대한 경영자라는 스티브 잡스다.


이철호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