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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알퍼의 한국 일기] 안주의 나라 한국, 술만 마시는 나라 영국

바람아님 2017. 8. 22. 07:04

(조선일보 2017.08.22 팀 알퍼 칼럼니스트)


영국인은 오직 술만 마시는데 한국인 "새우깡이라도 있어야" 

신윤복·김홍도 풍속화엔 주막… 애주가의 나라임을 증명해 

셰익스피어·디킨스 작품에도 맥주 넘치지만 안주는 없어


팀 알퍼 칼럼니스트영국을 떠나 한국에 정착해 살아온 12년 동안 내가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영국 사람들이 맥주를 마실 때는 어떤 안주를 즐겨 먹나요? 피시 앤드 칩스인가요?"였다.


나는 이 질문이 정말 순수한 호기심 차원인지 아니면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 음식을 빗댄 은근한 조롱인지 

아직도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은 결코 영국 정통 피시 앤드 칩스를 경험해 본 적이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영국에 갈 기회가 있다면 정통 피시 앤드 칩스 전문점에 들러 주문해 보라. 

큼직하게 썬 감자에다 두꺼운 튀김옷을 입혀 튀겨낸, 성인 남자 팔뚝은 족히 될 법한 크기의 대구를 얹은 후 버터, 크림, 

소금을 넣어 걸쭉하게 만든 머시 피(mushy peas·삶아서 으깬 완두콩)를 곁들인 정통 영국식 피시 앤드 칩스를 다 먹고 

맥주까지 마셨다간 소화불량으로 병원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피시 앤드 칩스는 1년에 한두 번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배가 부를 때까지 먹는 음식이라는 정도로만 설명한다. 그러면 대개의 한국인은 "그럼 영국인은 어떤 안주로 배를 

채우느냐"고 다시 묻는다. 내 대답은 언제나 그들을 놀라게 한다. 사실 영국에는 안주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안주에 

해당하는 적절한 영어 단어조차 없다. 

이런 정황은 한국 사람들에게 영국 음주 문화에 대한 궁금증을 더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영국사람들은 이렇게 술을 마신다. 오후 5시나 6시쯤 퇴근하고 곧장 펍(pub)으로 향한다. 

아무 안주 없이 펍이 문을 닫는 밤 11시까지 마시고 또 마신다. 

그러다 술에 흠뻑 취할 때쯤 펍을 나와 기름진 케밥으로 허기를 달래거나 종종 주먹 싸움에 휘말린다. 

아니면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어떻게든 집을 찾아 돌아가 소파에 대자로 뻗는다. 

빈 위장에 술을 퍼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증거가 바로 영국인들이다. 

만약 영국 사람들이 잠깐이라도 술잔을 멈추고 위장을 조금이라도 안주로 채울 수 있었다면 이런 엉망진창 

상황까지는 만들지 않을 것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한국에선 극단적으로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안주 없이 술만 마시는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낯설다. 

만약 한국에서 술자리가 5차까지 이어진다면, 일개 소대를 먹이기에도 충분한 양의 음식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차에서 술과 함께 푸짐한 안주로 잔뜩 배를 채우고, 2차로 골뱅이집이나 족발집을 향한다. 

그 후에는 맥주에 프라이드치킨을 곁들여 3차를 하고, 다음은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정크 푸드를 섭렵한다. 

그리 튼튼하지 않은 위를 가진 나는 언제나 2차쯤에서 자리를 빠져나올 궁리를 한다.


안주를 대하는 자세는 거리, 언어, 종교 등 그 무엇보다도 한국과 영국, 두 나라의 차이를 벌려 놓는 것 같다. 

진짜 영국 토박이는 맥주를 마실 때 절대로 안주를 먹지 않는다. 

그들은 음식 맛이 맥주의 풍미를 망칠 것이며 술을 마시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을 완전 별개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노숙자조차도 소주를 마실 때 새우깡 한 봉지쯤은 곁들이려 할 것이다.


최근 한국의 많은 TV 드라마가 유교를 바탕으로 금욕적이고 청빈한 삶을 동경하던 조선 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신윤복과 김홍도의 화폭에는 그와는 아주 다른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들의 그림에서 주막은 당시 일상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심 소재들이다. 

만취해 나무 아래 늘어져 있는 사람, 점심을 먹으며 커다란 사발에 담긴 술을 들이켜는 농부, 

마당을 드나드는 아이와 아낙들, 주막에서는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을 볼 수 있다. 

한국은 한때 방방곡곡에 주막과 애주가들로 가득한 나라였던 듯하다.


영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영국이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절, 영국에서는 누구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물을 위험하고 더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남녀노소 모두 '스몰 비어(small beer)'라고 불리는 맥주를 마셨다. 

스몰 비어는 여과되지 않아 걸쭉하고 포만감을 주는 죽 같은 형태의 음료로 알코올 함량은 0.75%에 불과했다. 

당시 영국 노동자와 선원들은 하루에 6L가 넘는 스몰 비어를 마시는 날도 많았다.


한국의 주막처럼 영국의 고전 문학에서도 펍은 끊임없이 등장하는 소재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순례자들이 처음 만난 곳도 펍이었고 디킨스의 소설과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도 

지독한 맥주 냄새로 가득한 시끄러운 펍은 자주 등장하는 배경이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분주한 술집에서도 

안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반면 조선 시대 그림에서 술과 안주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어울린다. 

음식이 등장하는 그림에는 반드시 술이 있고, 술이 담긴 커다란 사발 옆엔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안주가 잔뜩 담긴 소반이 

함께 있다. 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두 나라가 안주에 대해서만은 왜 이토록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