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7.08.31. 02:59
작년 어느 밤, 서울 창덕궁 ‘달빛 기행’에 참가했다. 고즈넉한 밤을 거닐며 궁궐과 정원, 달빛에 잠긴 기와를 감상하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흥미로운 무언가가 소리로 먼저 다가왔다. 밤공기 사이로 현악기의 깊고 느린 음률이 하나씩 울렸다. 음 하나하나가 공기에 녹아 들어, 내 마음을 직접 어루만졌다. 한복 차림을 한 어떤 남자가 정자에 홀로 앉아 거문고 현을 유유자적 뜯고 있는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그를 지켜보는 청중은 아무도 없었다. 그 또한 그저 외따로 앉아, 음 하나씩 밤공기 속으로 퉁겨 보냈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을 눈치채지 못한 채.
이러한 생각은 작품의 탄생이라는 종착지 못지않게 종착지로 향하는 예술의 여정을 고양한다. 작업 과정 자체가 예술가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한번 깨달음이 오자 한국 비주얼 아트에서도 같은 개념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서보 작가 등이 속한 단색화 사조에서도 그런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명상을 벗 삼아 생각을 비우고 고취하는 방법으로 활용하며 모티프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오랜 시간에 거쳐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옻칠 작가 허명욱 또한 매일 옻으로 새롭게 덧칠해 6개월에 걸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작업 과정이라는 여정 자체가 중심이 된다. 작업을 마치고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은 여정의 구체화일 뿐이다.
그날 밤 이후 거문고를 배우고 싶어졌다. 몇 번 수업을 듣고, 온라인으로도 공부했다. 선비들이 보통 집에서 혼자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점이 깊은 인상을 심었다. 서양 문화에서는 대체로 음악이나 노래를 청중에게 선보이기 위해 악기를 배운다. 선비들에게 거문고는 정신 수양이나 덕성 함양, 선비정신을 고취하는 수단이었다. 예술을 공연이 아니라 수양의 방편으로 한다는 생각은 놀라웠다.
뉴욕 미술관에서라면 전시작을 보고 ‘아름다운 그림이군’ 하고 생각하거나 ‘작품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들지?’라고 질문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다르다. 거문고 음을 듣거나 미술관 그림을 보면,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이 작가의 여정은 어땠을까.’ 놀랍게도 작품 또한 내게 묻는다. ‘당신의 여정은 어떻습니까’ ‘일상에서 어떤 명상을 합니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방식의 정신 수양을 하고 덕성을 기릅니까’.
마크 테토 미국인·JTBC ‘비정상회담’ 출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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