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9.02 송태호 송내과의원 원장·의학박사)
[송태호의 의사도 사람]
가족끼리 저녁먹다 "만약에…"
아내는 딸아이 학교가서 챙기고… 난 약 싸들고 누구라도 도와야지
내가 꾼 전쟁 꿈은 길하다지만… 만에 하나라도 생각은 해봐야
몇 년 전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었다.
하늘에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환한 빛이 번쩍이더니 천둥보다 큰 소리와 진동이 울렸다.
'올 게 왔구나' 하는 생각에 허둥지둥 가족을 찾다가 잠에서 퍼뜩 깼다.
한동안 황망하게 앉아 있다가 냉장고를 열어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난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두 딸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고 거실에 앉았더니 개들이 달려와 애교를 떨었다.
평화로운 새벽에 나만 심란했다.
그날 아침 아내는 "전쟁 꿈은 좋은 꿈"이라며 "로또라도 사봐야겠다"고 했다.
군의관이 되려고 교육을 받을 때 핵전쟁 시 행동 요령을 배웠다.
폭탄이 터진 뒤 후폭풍과 낙진이 훨씬 광범위한 피해를 일으킨다는 것,
폭탄이 떨어진 반대 방향으로 땅에 납작 엎드려야 한다는 것 등을 이야기하던 교관은
"핵폭탄이 수㎞ 이내 가까운 곳에서 터지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마지막 말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며칠 전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는데 한동안 큰딸 유학 생활을 봐주러 해외로 나가는 아내가 "라면이랑 즉석밥이라도
사놓아야 할까"라고 했다. 내가 작은딸과 둘이 2주가량 있어야 하니까 끼니 걱정을 한 건지 일촉즉발의 우리나라 정세를
걱정한 것인지 몰라 물으니 "반쯤은 전쟁이 날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내친김에 가족과 만약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얘기를 나눴다.
외국에서 더 걱정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아직 휴전 국가라는 것을 잊고 너무 태평하게 사는 것 같다.
우리 아파트는 지하 주차장이 2층까지 있으므로 집에 있을 때는 지하로 대피해야 한다.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장기전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루 이틀이면 결판이 날 테니 비상식량도 별로 필요 없을 것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때를 보면 물을 며칠 마시지 않아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지하로 대피할 때 개들을 데리고 갈 테니 개 사료를 준비하면 유사시에 그것도 열량 높은 비상식량이 될 것이다.
일과 중에 무슨 일이 터지면 학생인 딸들은 학교에서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면 될 것이고 아내는 딸이 있는 학교로
가기로 했다.내가 문제인데 그 상황이라면 당연히 차량 운행이 통제되고 강을 건너 집에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병원에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의약품을 챙겨 근처 지하철역으로 대피했다가 군부대로 갈 생각이다.
나는 내과의사라서 외상이 대부분인 전쟁통에서는 별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처를 꿰매고 부목을 대고 수액을 놓아주며 민간인을 치료하는 등 할 수 있는 한 무엇이라도 하면서
최대한 도와야 할 것이다. 이미 동원 예비군과 민방위까지 졸업했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의사로서 유사시에
내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이다.
1999년 제1차 연평해전이 일어났을 때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부대는 완전 무장한 채 출동 대기 상태에 있었다.
그때 휴가 중이던 우리 부대 군인들이 자발적으로 부대로 복귀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행정보급관에게서 들었다.
강릉 무장공비 사태 때도 예비군 역할이 매우 컸다고 들었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만에 하나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 두는 게 현명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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