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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이 수컷 선택권 갖는 건 ‘부모 투자’ 많이 하기 때문

바람아님 2017. 9. 4. 09:14

[중앙선데이]  2017.09.03 01:00

포유류 95% 임신·양육 암컷 책임
물범 수컷은 싸움 끝 승자가 독식
공작새 화려한 꼬리로 구애 경쟁

모르몬귀뚜라미·실고기는
수컷이 더 투자, 암컷이 구애
인간은 느슨한 일부일처가 보편적


[조현욱의 빅 히스토리] 짝짓기의 과학
화려함을 자랑하는 수컷 공작새. 수컷의 꼬리가 길고 화려할수록 암컷의 짝짓기 선택을 받기에 유리하다고 한다. 화려한 꼬리는 수컷의 정력과 건강,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진정한 지표라는 것이다.

화려함을 자랑하는 수컷 공작새. 수컷의 꼬리가 길고 화려할수록 암컷의 짝짓기 선택을 받기에 유리하다고 한다. 화려한 꼬리는 수컷의 정력과 건강,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진정한 지표라는 것이다.


동물이 짝짓기를 위해 경쟁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승자 독식이다. 사회성 동물인 사슴이나 물범은 수컷끼리 싸움을 벌여 승자가 모든 암컷을 독차지한다. 몸집이 클수록 승자가 돼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길 확률이 높아진다. 남극해에 사는 코끼리물범 수컷의 몸무게가 암컷의 다섯 배인 3t에 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피투성이가 되는 싸움 끝에 승자는 수십 마리의 암컷을 독점하게 된다. 하지만 도전자들을 싸워서 물리치고 너무 많은 상대와 계속 교미하느라 건강을 해치게 마련이다. 그는 1~2년 군림하다 더 젊거나 강한 수컷에게 물려 죽고 만다.  
 
둘째, 매력에 의한 승부다. 공작새는 꼬리가 가장 길고 화려한 수컷이 암컷의 선택을 받는다. 꼬리가 성장유지에 에너지가 많이 들고 위험까지 초래하는 값비싼 장신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같은 핸디캡을 딛고 살아남아 선명한 무늬를 자랑하는 것은 유전자에 이상이 없고 영양상태가 좋고 기생충이 없으며 생존능력이 강하다는 증거다. 화려한 꼬리는 수컷의 정력과 건강,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진정한 지표라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두 가지 짝짓기 방식이 수컷을 앞세웠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71년 찰스 다윈이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에서 내놓은 설명을 보자. 이에 따르면 구애와 짝짓기의 영역에서 상대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부담은 통상 수컷에게 더욱 강하게 부과된다. 큰 몸집이나 커다란 뿔 같은 특성이 그래서 진화했다. 영토, 사회적 지위, 짝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끼리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호감을 유도하기 위해 미학적인 특징을 진화시킨 것도 대개 수컷이다. 공작의 깃털, 십자매의 정교한 구애 노래가 이런 예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성선택의 압력이 수컷에게 더 강하게 작동하는(더 극심한 경쟁에 노출된) 이유는 무엇일까.
 
실고기의 일종. 실고기는 수컷이 암컷보다 자식에게 더 많이 투자한다. 그래서 암컷들은 서로 간택 받으려 수컷 앞에서 치열하게 경쟁한다.

실고기의 일종. 실고기는 수컷이 암컷보다 자식에게 더 많이 투자한다. 그래서 암컷들은 서로 간택 받으려 수컷 앞에서 치열하게 경쟁한다.


1972년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스(현재 럿거스 대학 교수)가 설명을 제시했다. 암수가 자식에게 주는 ‘부모 투자’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모 투자는 생식세포에 든 영양분, 임신, 출산, 젖 먹이기, 음식물 공급, 보호, 안아주기 등 자식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부모가 행하는 모든 형태의 노력을 말한다.
 
생식세포 하나당 투입하는 영양분만 놓고 따지면, 당연히 암컷이 자식에게 더 많이 투자한다.  수정 이후의 투자 형태를 보아도 대체로 암컷의 몫이 크다. 포유류 종의 95%가 임신, 수유, 양육의 부담을 혼자 짊어진다. 수컷이 자식을 함께 돌보는 종은 5%에 불과하다. 조류에서는 암수가 함께 자식을 돌보는 종이 가장 흔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암컷의 투자가 더 크다. 체외 수정을 하는 어류는 수컷이 혼자 새끼를 돌보는 경우가 더 많다.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 버리면 수정란 양육이 수컷 몫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트리버스는 이러한 투자량의 차이가 어느 성이 자기들끼리 경쟁하고 어느 성이 파트너를 고르는지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투자를 더 많이 하는 성-대개 여성-이 누구와 짝을 지을까를 신중하게 고려한다. 부모 투자가 적은 성-대개 남성-은 많이 투자하는 성의 개체들과 짝짓기하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경쟁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오게 되는 예측이 있다. 거꾸로 수컷이 암컷보다 자식에게 투자를 많이 하는 종에서는 이 같은 성 역할이 역전되어 나타날 것이다.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 짝짓기 상대를 신중하게 고를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사실로 확인됐다. 예컨대 모르몬귀뚜라미(이름과 달리 여치의 일종이다)는 수컷의 투자가 암컷보다 크다. 섹스 도중에 정자와 함께 영양이 풍부한 꾸러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를 만드는 데 수컷 체중의 27%가 소모된다. 암컷들은 수컷에 접근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수컷이 상대를 선택한다.  
 
실고기 암컷은 알을 수컷의 육아낭에 집어넣고 홀연히 가버린다. 이렇게 ‘임신한’ 수컷은 여러 주 동안 수정란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한다. 자식에게 투자를 더 많이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암컷들은 서로 간택을 받으려 수컷 앞에서 치열하게 경쟁한다.  수컷은 작고 밋밋한 암컷보다 크고 화려한 상대를 신중하게 선택하여 알을 받는다.  
 
 
폭군 이스마일, 자식 1171명 낳아
‘부모 투자’ 이론은 사람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남성은 몇 시간 투자해 씨를 뿌리면 번식에 성공할 수 있다. 자식을 많이 나으려면 짝짓기 상대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지위, 권력, 부를 얻기 위해 무리한 경쟁을 벌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여성은 1년에 한 명의 자식만을 낳을 수 있다. 게다가 과거 수렵채집 시대엔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했는데 이 기간에는 배란이 되지 않는다. 자식을 많이 낳고 싶어도 3, 4년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책임감과 부양능력이 우수한 남성을 신중히 고르지 않은 여성은 도태됐을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보자. 17세기 모로코를 지배한 폭군 물레이 이스마일은 4명의 부인과 500여 명의 첩 사이에 1171명의 자식을 낳았다. 반면에 기네스북에 등재된 여성 최고 기록은 평생 27차례 임신해서 69명의 자녀를 낳은 러시아 여성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남성은 다수에게 씨를 뿌리기보다 한 명의 배우자에게 정착하는 경향이 크다.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모든 문화의 17%는 엄격한 일부일처제를 고수하고 있다. 83%의 인간 사회는 일부다처, 드물게는 일처다부까지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일부일처제로 살고 있다.  
 
남성이 결혼에 정착하는 데는 ‘배란 은폐’가 큰 몫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간은 연중 섹스가 가능할 뿐 아니라 임신이 가능한 배란기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특이한 동물이다. 따라서 남성은 자원을 제공하면서 여성을 곁에서 독점해야 자식이 자신의 씨임을 믿을 수 있다. 그런 틈틈이 다른 여성에게 눈을 돌리면 번식 성공률은 더 높아진다. 독점+알파 전략을 취한 ‘호색한 조상’의 후손들이 많은 이유다.
 
하지만 수렵채집 시대에 진화한 심리가 21세기에도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의 해설이다. 인류는 그동안 유전적으로 거의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남성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옛 시대의 단순한 적응 행태가 도사리고 있다. “권력을 얻어서 그것을 후계자를 낳을 여성을 유혹하는 데 사용하라.” “부를 얻어서 그것을 혼외자식을 낳는 데 사용하라. 다른 남자의 부인과 불륜을 저지를 기회를 사라.” 그런가 하면 현대 여성의 마음 깊은 곳에도 이에 대응하는 법칙이 도사리고 있다. “음식을 제공하고 아이들을 돌볼 부양자 남편을 얻도록 노력하라. 그 아이들에게 1등급 유전자를 줄 수 있는 애인을 찾도록 노력하라.”(『붉은 여왕』·매트 리들리).  
 
 
현대 남성, 수렵채집 시대 행태 남아
지금껏 인류학자들이 조사한 모든 인간 사회에서 확인된 사실이 있다. 부부가 함께 오랫동안 가정을 꾸리는 짝-결속(pair-bonding)과 배우자 몰래 다른 상대와 일시적인 성관계를 맺는 행태가 함께 나타난다는 점이다. 느슨한 일부일처제가 보편적 행태라는 말이다. 하지만 ‘남성의 바람기는 적응적 특성’이라며 정당화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본능은 그보다 나아지라고 있는 것이지 그대로 따르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인간이 물려받는 특정한 사회적 생태적 환경은 적응적 특성이 발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컨대 나방의 경우 애벌레 시절 개체 밀도가 높은 환경에서 지낸 수컷 나방은 특별히 커다란 고환을 발달시키게 된다. 수많은 수컷들과 극심한 교미 경쟁을 치르는 데 유리한 특성이다. ‘유전적으로 결정된 적응적 특성’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개체 밀도가 낮은 환경에서 자란 동일한 종의 수컷 나방들은 날개와 더듬이가 커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암컷을 찾기 위해서다.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형질이 발현한 것이다.   
 
환경 입력은 포유동물의 적응 행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들쥐 어미는 수컷 새끼의 항문과 성기 부위를 암컷의 것보다 자주 핥아 준다. 새끼의 소변에 포함된 남성호르몬에 끌리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수컷 새끼의 뇌에서 짝짓기 행태와 관련된 여러 부위가 암컷과 다르게 발달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례는 젠더 즉 성 역할의 평등과 관련해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젠더란 “생물학적 성에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부여된 의미”를 뜻한다.  

 
과거 우리의 진화사에서 남성이 이런 저런 위험을 감수하고 여성은 이를 회피하는 것이 적응적이었을 수도 있다. 남성이 대담한 바람둥이고 여성이 정숙하고 안전지향적이라는 고정관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문화가 바뀌면 성별에 따라 행태가 달라지는 패턴 역시 달라질 수 있다. “양성의 행태와 욕구의 차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한 적응이므로 바뀌기 어렵다”고 주장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양성 평등을 지향하는 보상, 처벌, 규범과 응보 체계가 필요한 이유다.  
 
 
조현욱 과학과 소통 대표

서울대 졸업. 중앙일보 논설위원, 객원 과학전문기자, 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역임. 2011~2013년 중앙일보에 ‘조현욱의 과학산책’ 칼럼을 연재했다. 빅 히스토리와 관련한 저술과 강연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