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0.14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대표)
[남정욱의 명랑笑說]
이병헌, 자네 성공은 '運三技七'
할리우드로의 멋진 진출… 그의 재능과 영민함, 그리고 꾸준한 노력 덕
하지만… 한국 영화의 폭발 성장, 그 덕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라 運이 걱정
배우 이병헌과 소생은 동기(同期)다. 학교나 군대를 같이 다닌 건 아니고
연예계 입문이 그렇다는 얘기다. 이병헌은 방송국 공채로 들어온 신인 탤런트였고
나는 방송작가 보조로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때였다. 참고로 방송작가 보조란
'방송'이나 '작가'와는 무관하고 오로지 '보조'인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처음 안면을 튼 건 이병헌의 데뷔작인 청춘드라마 '내일은 사랑' 촬영장이었다.
인물도 좋았지만 두뇌 회전이 정말 빨랐던 기억이 난다. 어쩌다 술자리를 할 일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신인들이 그렇듯 서로에게 "당신, 앞으로 잘될 거예요" 따위의
근거 없는 덕담을 주고받곤 했다.
그때 소생이 이병헌에게 "귀하는 앞으로 20년 후 브루스 윌리스,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함께 영화를 찍게 될 것이오" 했으면 어땠을까.
그는 나를 때렸을 것이다. 그건 덕담이 아니다.
그 말은 네 인생 따위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말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병헌을 다시 만난 건 충무로 영화판에서였다.
당시 그는 '지상만가'라는 작품에 출연하고 있었는데 시나리오와 감독이 영화를
말아먹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그런 영화였다. 그 사이 방송작가 보조에서 업종이 바뀐 나는 그 작품의 홍보를 맡은 마케터였다.
영화 속에서 이병헌은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배우 지망생이었고 그의 마지막은 무리한 스턴트 연기로 추락사인가를 하는
거였다. 무지하게 비관적으로 상징적인 장면이라 생각했다. 저나 나나 변방에서 그렇고 그런 영화나 찍고 홍보하다가 끝나는
인생이 될 것 같아 내내 울적했다.
영화판은 고달픈 동네다.
감독 보조인 연출부는 연봉 200만원으로 버티는데 배우 문성근은 이걸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부르기도 했다.
홍보 쪽도 일 없을 때는 비슷하다. 더 이상 인생을 방치할 수는 없도다, 고민 중에 마침 IT 열풍이 불었다.
미련 없이 충무로를 떠나 역삼동 IT 골목에 몸을 던졌지만 돈 피해가는 재주 하나는 참으로 남달라서 상투를 잡고 폭탄 돌리기
게임 끝에 산업적으로 전사(戰死)했다. 그렇게 소생이 바닥을 다지는 동안(지나고 보니 인생에 바닥 같은 건 없었다.
파면 또 바닥이 나온다) 그는 꾸준하게 필모그래피를 늘려가고 있었다. 마침 한국 영화가 외연을 확장해 가는 시기였고
이병헌은 '쓰리, 몬스터'로 한국 영화가 아닌 아시아 영화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잘됐다는 생각은 했지만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펼쳐진 이병헌의 성공적인 할리우드 진출기는 독자 여러분이 아시는 그대로다.
이병헌 이전이라고 그만한 인물이 없었고 그만한 연기가 없었을 리 없다.
그러나 재능과 노력만으로 완성되는 성공의 공식은 없다. 마지막 순간에는 반드시 운이 받쳐줘야 한다. 한국 영화 시장이
지금처럼 커지지 않았다면 이병헌의 할리우드 진출 역시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라의 운이 상승하면 개인이 차지할 행운의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반대도 마찬가지.
운이 기울면 개인의 불운 가능성도 덩달아 높아진다.
운 좋은 나라와 불운한 나라의 기로에 서 있는 대한민국을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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